제 1편. 향기로운 주향(酒香)이 수줍은 새색시의 속살처럼 익어 가는 도화원 (桃花園). 도정(到貞)은 꽃잎이 날리는 그 속을 사박사박 걸어가다, 잠시 '멈칫'하 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느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버님.」 태감의 의복을 갖춰 입었지만 환관답지 않게 성큼성큼 앞서가던 도욱 (到煜)이 그리 묻자, 도정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부리부리한 두 눈과 생각보다 꼿꼿한 허리를 보건대, 사고로 인해 스스 로 환관이 된 사백(私白)임을 짐작케 하는 도욱은 나이치고는 조숙한 기 질을 가진 양아들이 드물게 허둥지둥 하는 모양새가 재미있었던지 다시 몇 걸음을 되돌아와 도정의 앞에 섰다. 「왜, 그러느니?」 「저… 궁에서는 비료로 인분(人粉)를 쓰고 있는지를 몰랐기에 잠시 저어했을 뿐입니다.」 난처한 기색을 읽었으면서도 계속 되묻는 도욱의 집요함에 도정은 살 짝 얼굴을 붉히며 그리 대답했다. 「인분(人粉)이라니……?!」 그건 시체를 나무의 비료로 쓰고 있다는 말이 아니던가. 의외의 대답에 낯빛을 굳힌 도욱은 양아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쫓았 다. 수북히 쌓인 꽃잎. 또 꽃잎들. 마치, 꽃무덤이라고 해도 좋은 거기의 둔덕은 다른 곳보다도 유난히 도 드라져 있었다. 결정적으로 흩어진 분홍빛 꽃잎 아래 삐죽이 모습을 드 러낸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사람의 손이 분명할진대……. 이… 이런! 도욱은 허둥지둥 그곳으로 달려가 꽃잎들을 마구 헤집었다. 얼마만큼 그렇게 헤집었을까. 금실과 자수가 수놓아진 신발이 반쯤 벗겨진 두 발이 드러나고, 이윽고 비단의를 휘감은 전신이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왔다. 용케 비료로 삭혀지지 않았던 듯, 잔 나무뿌리와 흙먼지를 제외하면 멀 쩡한 그 얼굴은 아직은 앳된 소년의 면영을 가지고 있었다. 순간, 도욱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렇게……. ―…화… 황자 전하아아아―――!! 탁. 도정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하자, 그때서야 한숨을 내쉬며 격자창 앞으로 다가갔다. 환관들이 머무는 별채의 담 너머로 어스름한 붉은 석양빛을 눈부시게 반사시키는 황금빛 유리와(琉璃瓦), 상서로운 주(朱)로 무장한 천향자단 (天香紫檀)의 아름드리 기둥들, 금방이라도 하늘로 비상할 듯한 처마와 화려한 단청(丹靑)이 시야를 자극한다. 그렇다. 이곳은 구중궁궐(九重宮闕). 범인들은 감히 근접조차 할 수 없는 황제가 머무는 황성(皇城)이었다. 겉보기에 열 서넛 살쯤 되어 보이는 도정은 격자창에서 다시 문 밖으 로 시선을 주며 살짝 이마를 찡그렸다. 대들보 위에 놓아둔 예의 그것에 생각이 미친 것이었다. 환관이 죽었을 때 성한 남자의 모습으로 저승세계로 가길 바라는 마음 에서 분리해낸 양물(陽物)을 목갑 안에 넣어 그가 사는 사랑의 대들보 위에 잘 보관해 둔다던가. 어쨌거나, 그 물건은 환관 자신보다도 더 중히 여겨진 탓에 고승(高升) 이라 불려지며, 승직할 때 저게 없다면 출세도 할 수 없다. 덕분에, 그 보물이 없는 환관들은 막대한 돈으로 남의 그것을 비밀리에 사들이는 편 법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도정이 지닌 예의 보물도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기분이 지금 썩 유쾌하지 못한 건… 머리 위에 어느 놈 팽이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냄새 나는 물건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데서 기인하고 있었다. 거기다, 사들일 때 바가지를 쓴 게 분명하다는 찜찜함도 그 불유쾌함을 더했으면 더했지, 못 하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자면 익숙하지 못한 지금의 자 신의 모습 때문이리라. 젖살이 급작스럽게 빠진 듯한 갸름한 얼굴선. 흑백이 뚜렷한 두 눈은 원래 젖어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주사빛 입술과 어린 환관다운 당당하지 못한 사지. 환관의 모습에 최대한 뜯어 맞춘 듯한 여린 그 얼굴에 짜증이 나지 않 는다면 그거야말로 거짓말이랄까. (뭐어, 자초한 거긴 하지만… 되도록 일찍 뜰 수 있도록 노력을 해봐야지.) 도정에게는 목적이 있었다. 이 깊은 구중심처(九重深處)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습까지 감수하고 뛰어든 그런 목적이. 상선감(尙膳監)의 태감인 도욱과 연이 닿았던 건, 그 와중에서도 순조 로운 출발의 행운이었다. 이런 모습의 자신의 어디가 ― 물론, 가장 환 관의 재질을 갖춘 모습 같긴 하지만 ― 그리 마음에 들었는지, 양아들로 삼기까지 한 터였으니까. 덕분에 그나마 구질구질한 일들에 시달리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도욱의 수발만 들면 되었으니, 같이 입궁한 다른 어린 환관들보다도 여가를 많 이 활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이런 꼴이라니… 적염랑(赤焰狼) 서문정(西門貞)의 이름이 울겠군. 도정, 아니 서문정은 다시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이라도 그를 아는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면, 당장 문을 박차고 달 려나갔을지도 모르는 일. 어딘가로 기척 없이 숨어드는 일은 숨을 쉬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었지 만, 황성이라는 곳은 원래 무림인이 금기시하는 장소가 아니던가. 관(官)과 무림은 서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의 이해가 이루어지 고 있었으니까. 시야의 높이가 확연히 달라진 신체에 아직 적응이 되지 못하는 걸 감 내하며 도정은 침상에 천천히 몸을 눕혔다. 황궁에 잠입하기 위해 한동안 고심을 한 덕인지, 애써 잊고 잊었던 피 곤함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물론, 무공으로 단련이 된 그가 쉽게 피로 함을 느낄 리가 없겠지만 이 부분은 정신적인 면이 크게 작용하는 듯 싶 었다. 그보다……. ―기문왕자(琦文王子) 주가휘(朱加煇)라……. 태화문(太和門)을 거쳐 이곳으로 오는 도중 들린 도화원(桃花園). 그곳의 꽃무덤에 묻혀있던 예의 소년이 불현듯 떠오르자, 도정은 그 때 느꼈던 황당함을 다시 되새김해야만 했다. 궁녀나 환관조차 대동하지 않고, 급하게 문연각(文淵閣)을 찾아오다 떨 어지는 도화꽃에 취해 잠이 들었다니… 그야말로 성정이 괴이한 황자가 아닌가. 아무리 황성이라고 하지만, 내정(內廷)은 고사하고 외조(外朝)조차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어린 환관의 신분으로서는 입궁하자마자 황 자의 얼굴을 대면할 수 있을 경우는 지극히 희박한 일에 속했다. 게다가, 그런 무방비한 모습의 황자라니… 정말로 예상외라고나 할까. 멀리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는 자신이다 보니 당연히 파묻혀 있던 이가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대체 누가 저런 곳에서 용감무쌍하게 퍼져 자고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더 강했기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던 도정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오래 있었는지, 꽤 깊숙이 묻혀 있던 황자. 하지만, 드러난 얼굴을 발견한 순간… 솔직히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헛바람을 삼킨 그이기도 했다. 지금의 자신의 모습과 거의 동년배로 보이는 소년의 피부는 빙기옥골 (氷肌玉骨)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희디희었고, 그린 듯한 아미(蛾 眉)에 오똑한 콧날. 몸에 걸친 용포(龍袍)만 아니라면 천하절색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도욱이 허둥지둥 태의(太醫)를 부르려는 찰나, 눈을 뜬 황자는 감고 있 을 때보다도 더 선렬한 인상을 남겼다. 푸른 기가 돌 정도로 새까만 눈동자는 총기를 내포하는 한편,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기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얼굴에 사내라니…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소년이었지. 자신답지 않게 어이없는 표정을 드러내자, '배시시' 웃기까지 하던 황자 였다. 어쨌거나, 평생을 환관으로 지낼 처지도 아니니… 별로 상관할 인간은 아닌 셈이었다. 어차피, 무림인인 그에게 황실의 사람은 평생 연이 없을 존재들에 불과 하니까. 지금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한순간의 바람일 뿐―. 긴 관도 위를 훑고 지나가는 저문 날의 황사(黃砂). 단지 그뿐임을……. 환관… 또 환관들. 솔직히 이제는 좀 그만 봤으면 싶은 광경이지만, 자신 또한 여기서는 그 발에 채이는 만큼의 환관이다보니 딱히 불평할 처지도 못 되는 도정 이었다. 환관들을 가르치는 내서당(內書堂)에 출입한 지도 며칠이 지난 지금, 첫날 쓸데없는 소리만 줄창 늘어놓고 사라진 사례감(司禮監) 제독의 얼 굴이 보이지 않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지도. 물론, 그렇게 생각한 건 주변이 그를 내버려 둘 때만이었다. 「도정이라고 했지? 너는 상선감(尙膳監) 도공공 나으리의 양자로 들 어갔다면서? 모두들 부러워하는 것 알고 있어?」 「윗나으리들보다 겨우 삼 년 먼저 입궁한 녀석들이 얼마나 텃세가 심 한지 알기나 해? 어젯밤에도 빨래만 하다 잠도 제대로 못 잤다니까.」 불만을 토로하는 또래의 소년들에게 둘러싸인 도정은 멀뚱히 눈만 꿈 뻑꿈뻑거렸다. 그러니까, 대체 언제부터 친하게 지냈다고 이렇게 몰려와서 야단들인 지……. 늙으나 어리나 환관들의 성정이 권력에 약하다는 건 정말인 모양이었 다. 같이 입궁한 이들 중 제일 끈을 잘 잡은 듯한 도정과 친분을 쌓아두 어서 손해 볼 건 없다는 심산인지도 몰랐다. 혹은, 후천적으로 중성이 된 그들이 양기(陽氣)를 지닌 도정에게 본능 적으로 끌리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나는 주작면국(酒醋麵局)에서 일하게 될 것 같으니, 자주 볼 수 있을 거야.」 자신을 간인령(簡仁令)이라 소개한 비교적 영준하게 생긴 소년이 함빡 웃으며 그리 말하자, 도정은 미간 사이를 찌푸렸다. 간인령이 보기에는 지기의 나이로 여겨질지 몰라도, 실제 그의 나이는 스물 두 살. 그들과 어울려 준다는 건 자신이 애들을 데리고 놀아준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입장이 입장이니 만큼 어쩔 수 없이 적당히 고개를 끄 덕여줄 수밖에―. 너무 혼자 따로 놀다보면, 오히려 눈에 띄기 마련이니까. 「소운! 너도 가만있지만 말고 뭐라고 해 봐!」 「어… 난 그냥…….」 며칠 사이에 꽤 친해진 듯 인령이 등뒤에 오도카니 서 있는 등소운(鄧 素雲)이란 소년을 떠밀었지만, 앞으로 밀려 나와서도 자신의 발끝만 바 라보며 머뭇머뭇 거리기만 한다. 인령이 준수하게 생긴 편이라면, 소운은 꽤나 예쁘장하게 생긴 데다 그 행동거지마저도 수줍음이 많아 어딘가 소녀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 다. 「소운도 사원국(司苑局)에 있게 된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상선감 도공공 나으리를 따라다니는 도정 너와는 얼굴을 익혀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같은 환관일지라도 이 넓은 황성에서 하는 일이 틀리면 여간해서는 부 딪치기도 힘들기 마련. 그나마 연관성이 있는 일에 종사하다 보면 친해 질 요지가 많은 건 사실이었다. 「그보다, 이런 손으로 험한 밭일을 해야 한다는 게 말이 돼? 누구는 은자를 써 어전환관(御殿宦官)이 되어 내정(內廷)에서 호위호식 하는데…….」 「…대신, 비빈마마나 황자들의 비위를 거슬리면 그날로 비명횡사 한다고 하니까… 난 사원국에서 일하는 게 오히려 좋아.」 소운은 자신의 가냘픈 손목을 흔들어 대는 인령의 말에 여전히 주저하 는 기색으로 그렇게 말을 띄운다. 하긴, 저런 심성이라면 윗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목적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도정 역시도 어전환관으로 차용되는 게 이 롭긴 하지만, 또 그만큼 자유를 속박 당하게 되니까… 지금의 입장이 훨 씬 나았다. 게다가, 하루에도 쉴 새 없이 두 무릎을 꿇어가며 예를 갖춘다는 건 그 야말로 질색인 절차라고나 할까. 적당히 도욱의 뒤나 쫓아다니며 궁성 내를 살피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 다. ―어허! 경망스럽구나! 동녀(童女)같이 모여 떠들어대는 그들의 작태가 심히 거슬렸는지, 내서 당의 환관이 버럭 노성을 질러댔다. 그걸 기회로 겨우 인령들과 헤어져 자신의 숙소로 향하게 된 도정이었 다. 무리와 어울리지 않고 홀로 나다니는 한 마리 늑대… 라는 뜻에서 별 호마저도 적염랑(赤焰狼)인 그가 이런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곤혹스러운 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역시나 사내 구실을 못하게 된 어린 환관들은 또래의 소년들보다도 상 대하기가 힘든 부분이 있었다. 특히, 누구의 옥대에 달린 패옥이 멋있었네… 어디의 소매부리 자수는 심상치 않은 솜씨였네… 라는 식의 대화의 물고는 아무리 그가 노력해도 따라갈 수가 없는 소재였다. ―후우… 아무리 뭐도 안 달린 족속들이라지만, 제발 계집애들 같은 수다는 자제를 해 줬으면 좋겠군. 적어도 금의위(錦衣衛)의 누군가가 찬 보검이 멋있더라… 정도는 되어 주어야 같이 어울리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일까. 내서당(內書堂)을 나서는 도정의 발걸음은 왠지 그지없이 무거워 보였 다. 그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듯이―. 측시초(丑時初)―. 깊은 밤의 한 자락이 내려앉는 전각의 한 지붕. 도정은 자신의 기척을 지운 채, 그 위에서 팔짱을 낀 자세로 아래를 내 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비상할 것 같은 봉황의 이중처마가 어둠에 맞물린 붉 은 담들과 함께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황성(皇城)은 달빛 아래 가라앉 은 정경으로 시야를 파고 들어온다. ―역시 황궁보고(皇宮寶庫)는 쉽게 잠입하기는 힘들겠군. 저 멀리 바라다 보이는 거대한 삼층누각. 그것이 도정이 목적하는 장소인 황궁보고였다. 각종의 진상품(進上品)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곳이기에 경비가 철통같 은 건 두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특히 귀중한 것들은 불에 타지 않게 석재(石材)의 지하보고에 보관해 두었다고 하니… 일이 한층 더 까다롭게 풀리리라. 물론, 처음부터 낙관적으로 기대하고 들어온 건 아니었다. 일반 무림 문파로 숨어드는 일과는 비교도 하기 힘드니까 말이다. ―이거야, 원… 마치 도둑이라도 된 기분이군. 기실, 도정… 아니, 서문정은 무림오비(武林五秘) 중 한 곳인 무영각 (無影閣)의 소각주(少閣主)였다. 문파의 위치를 위시하여 각주의 이름조차도 신비에 묻혀진 무영각. 십오야(十五夜), 붉은 보름달이 뜨는 밤, 대명문(大明門)과 백 오십 여 장 떨어진 송학루(松鶴樓)에 올라 거대한 연에 의뢰와 의뢰대금을 띄워 보내면 제시한 시일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원하는 대상의 죽음을 선물해준다는 암살집단. 요컨대, 도정은 촉망받는 살수이지… 하오문의 시시한 시정잡배나 도둑 따위는 결코 아닌 셈이었다. 하긴, 애초에 말이 흘러 들어온 출처는 도둑이 분명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설라무네, 우리 빌어먹을 똥자루 사부가 틀림없이 거기서 <무영검(無影劍)>인지 <노망검>인지 하는 케케묵은 비급을 봤다고 했다니까! 어어어! 그렇게 살벌하게 노려보면 나같이 먹고 살기 힘든 양상군자(梁上君子)는 오줌을 지릴지도 모른다니까! 음, 순순히 부는 이유? 거야, 이 기회를 빌미로 같은 무림오비 (武林五秘)사이에 돈독한 친분이나 쌓아둘까 어떨까… 해서 말이 야, 헤헤헤』 수상했다. 그지없이 수상했다. 낯짝 두껍기가 하늘마저도 치를 떤다는 철면비투(鐵面飛偸) 한대야(罕 大爺)의 입에서 쏟아진 말이 아닌가. 오죽하면, 그 스스로 지었다는 자 신의 이름마저도 '큰 어르신'인 놈이었다. 무림에서는 오비(五秘)를 일컬어 신비문파니 어쩌니 해도, 알고 보면 서로 박 터진다고 중원의 일에 관계하지 않는 것뿐인 사이에 무슨 돈독 할 정이 남아돌겠는가 말이다. 어쨌거나, 신투문(神偸門)의 소문주 철면비투와는 되도록 안면을 트지 않고 사는 게 일생에 도움이 된다는 건 만인이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곧 다가올 무림오비 비무대회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실 전된 무영검법(無影劍法)의 후삼식(後三式)이 누구보다도 필요한 도정이 었다. 백중지세인 서로의 세력권을 4년마다 새로이 가늠하기 위해 열리는 비 무대회. 때문에, 각 문파의 후계자들은 뼈를 깎는 수련을 거쳐 거기에 대비하는 것이다. 삼 년 전에 열린 비무대회에서 아깝게 호적수에게 패한 도정은 이번만 은 기필코 이기겠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었다. 『훗, 무림오비의 후기지수 중 가장 빼어난 준재라니… 너무 과대평가를 했군. 』 겨우 반초 차이로 이긴 주제에 온갖 잘난 척을 해대던 그 개자식을 생 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갈던 그가 아니던가. ―청안호리(靑眼狐狸) 호지연(胡支延)!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 역시나 무영각과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혈막(血幕)의 소막주와는 일의 관계상을 따지고 들어가도 결국 비교대상밖에 안 되는 적수인 셈이었다. 어쨌거나, 미심쩍은 구석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실전된 무영검 법의 비급이 저 황궁보고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이상 가만 히 있을 수도 없었던 도정이었다. 적어도 불완전한 무영검법을 완성해야 제대로 녀석과 맞붙을 수 있으 니까! 궁여지책으로 변용술과 축골공을 사용해 어린 환관의 모습으로 황성에 숨어든 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꼬락서니를 하게 된 원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깊은 밤이 저물고 황성의 하루가 시작되는 인시초(寅時初)가 될 때까 지도. 아마도 지붕 아래서 자고 있던 누군가는 원인 모를 오한에 틀림없이 잠을 설쳐야만 했으리라. 찰랑―. 도욱이 세수할 물을 받아놓은 도정은 다시 그가 씻기를 마칠 때까지 수건을 들고 곁에 조용히 시립해 있어야만 했다. 길게 산 건 아니지만 평생 받아보기는 했어도 결코 해 본 적이 없는 남의 시중. 살수의 수업을 오래 받은 탓에, 어느 곳이나 쉬이 잠입하기 위해 받은 신분위장의 술수가 몸에 배여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 원래의 그의 성격 대로라면 단번에 도욱을 패대기친 뒤 물을 다 엎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거기다 이런 꼭두새벽부터 일과가 시작되니, 잠을 잘 새가 도통 없었 다. 물론, 며칠 못 잔다고 어떻게 될 도정도 아니긴 했지만… 상쾌한 얼굴 로 '아, 잠을 잘 잤느니'라는 상대가 눈앞에 있다면 과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닐 터―. 「오늘은 연회가 있어, 바쁘겠느니.」 궁정 내 식사와 연회를 준비해야 하는 상선감(尙膳監)의 태감인 도욱 은 곧 의복을 정제한 뒤, 환관 특유의 약간 허리를 구부린 자세로 밖으 로 나선다. 평소와 다른 일정 때문인지, 그 발걸음은 제사를 지내는 봉선전(奉先 殿)이나 식사준비에 임하는 광록사(光祿寺) 대신 구룡벽(九龍壁)을 향한 다. 멈칫―. 종종걸음으로 도욱의 뒤를 따르던 도정은 부리부리한 용들이 금방이라 도 뛰쳐나올 것 같은 거대한 벽 앞에서 저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었다. 「왜, 그러느니?」 「저어… 제가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내정(內廷)의 환관이 아닌 바에야, 이 이상 안으로 들어선다는 건 문제 의 소지가 다분하지 않은가. 「괜찮느니, 남삼소(南三所)로 가는 것이니라.」 남삼소(南三所)는 어느 정도 자란 황자들이 모친인 비빈들의 궁에서 나와 거하게 되는 궁궐 동남쪽에 자리한 별채였다. 「기문왕자님의 생신축하연을 준비하러 가는 것이니.」 기문왕자(琦文王子)라면… 도정이 보았던 그 괴이한 황자를 일컬음이 었다. 내서당(內書堂)에는 비빈들이나 귀인들, 혹은 황자나 공주를 가까이서 모시게 될 환관들도 교육을 받으러 오기에, 이런저런 귀동냥을 듣게 되 는 경우가 많았다. 『여섯째 황자님은 돌아가신 단귀비(端貴妃) 마마의 소생이시지. 그 분은 성정이 착하시고 유하신데, 몸이 약하셔서 늘 약을 다려 먹고 계셔. 그래도 생전 단귀비 마마를 아끼셨던 황상(皇上)께서 그 분을 귀히 여겨자주 기문당(琦文堂)으로 행차하신다지,』 당금 십 사세의 황자. 나이보다도 더 어려 보였던 건, 역시 그 소녀 같은 용모 때문인지 도……. 어쨌거나, 키 높이 자란 백양나무와 소나무가 무성한 데를 지나 끝없이 이어진 낭하(廊下)를 구비구비 돌자… 이윽고, 아담하면서도 운치가 있 는 전각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침, 밖에 나와 있었던 듯 고개를 돌리며 활짝 웃는 소년의 모습 또 한. ―도공공! …목소리 또한 방울이 굴러가는 듯한 옥음(玉音)의 황자였다. 도정! 도정!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정말로 괴이하기 그지없는 황자였다. 또래의 자신이 친근하게 여겨진다며, 아까부터 계속 할 말도 없으면서 그렇게 이름을 부르거나 물끄러미 쳐다보며 배시시 웃어댄다. 눈빛은 총기가 가득해 어리숙한 것 같지는 않은데, 하는 짓은 왜 그리 실없기만 한지……. ―전하를 뵙습니다! 주가휘가 고개를 향한 순간, 황자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두 무릎을 바닥에 꿇고 머리를 조아린 도정이었다. 하지만, 곧 그가 쪼르륵 달려와 자신의 손을 잡고 일으킬 때부터 왠지 전조가 심상치 않았다. ―너는 그 때 도공공과 같이 있던 어린 환관이로구나! 이름이 뭐지? ―제 의자(義子)인 도정이라 합니다, 전하. ―치이, 도공공에게 물어본 게 아니예요! 응, 이름이 뭐야? ―…도정이라고 합니다만……. 대답을 가로챈 도욱에게 입을 삐죽여 보이고는 다시 환하게 되묻는 황 자의 깜찍스러운 행동에 적응이 되지 않던 도정은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곁에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이 황 자의 속셈이 무엇인지 어지럽기만 한 그인데……. (뭔가, 상당히 어지러운 기분이 드는 듯한… 허허… 허허허.) 뭐라고 해야 할까. 자신을 데리고 온 연유는 결국 연회준비를 할 동안 방해가 되지 않게 황자의 놀이상대가 되어 주고 있으라는 의도가 분명했다. 막말로 애 돌보기에 낙점이 되었다고나 걸까. 무영각에 있을 때는, 살벌한 그의 기세에 눌러 어린 녀석들은 근처에 오지도 못 했었지 않은가. 거기다가, 살수들을 길러내는 곳이니 만큼 주 가휘 또래의 소년들이라도 벌써 애늙은이 같은 세상 다 산 얼굴을 하고 음침하게 돌아다니기 마련이었다. 그런 도정이 척 보기에도 해맑고 곱게 자란 듯한 주가휘를 제대로 상 대해줄 여력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가 소년들을 나름대로 돌본다고 한다면… 나태해졌다고 연무대에 거 꾸로 매달아 놓는다던가, 그도 아니면 석 달 열흘 동안 물과 건량만을 조금 건네준 뒤 허허벌판에 던져놓고 살아 남으라고 한다던가, 실수를 했을 시 입에 든 독단을 효과적으로 삼키는 방법이라든가, 고문에 견딜 수 있도록 인두와 채찍으로 적당히 신체를 단련시켜 준다던가… 여하간 에 그런 것들뿐이었다. 생각해보면, 별로 황자를 상대로는 권장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도정은… 눈이 참 예쁘구나. 그런 말을 내뱉는 자신은 더하다는 자각은 대체 있는 건지, 없는 건 지……. 도정은 심히 듣기 거북한 말만 계속 해대는 주가휘를 앞에 두고 그저 실없이 고개를 끄덕여주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성정이 순하다 해도, 황자의 심사를 거슬려서 좋은 일은 없으니 까. ―도정! 이 패를 줄 테니 도공공과 함께가 아니어도 자주 와야 해! 도욱이 연회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러 왔을 때는, 도정의 손에는 이미 기 문당의 출입이 자유로운 황자의 호가 새겨진 자단목패가 들려져 있었다. 말인즉슨, 완곡한 표현을 쓰고 있지만 황자의 입에서 떨어진 이상 그건 이미 지고지엄한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목적하는 바를 제대로 실행조차 못 하고 있는 판국에 이게 무슨 수난인 건지……. ―난 네 녀석과 놀아주려고 이 황궁에 들어온 게 아니야! 아무리 얼굴만은 그 어떤 미소녀보다 아리땁다 하더라도 상대는 어린 애송이. 도대체, 자신의 일로도 버거운 이 마당에 굽신굽신 황자 따위나 돌보고 있을 여유 따윈 당연히 있을 리가 만무한 터―. 그래도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고 한 도정이었다. ―황자를 잘만 이용하면, 황궁보고에 들어가는 일이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을 테니까. 순진무구한 어린 소년을 속인다는 건 썩 내키지 않은 일이지만, 저쪽에 서 먼저 달라붙은 거니… 후회는 상대가 먼저 자초한 셈.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황자를 계속 대면해야 되는 지금의 입장에 대한 좋은 핑계거리가 되니까 말이다. …황궁에서의 생활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음을 거듭 깨닫게 된 도정이 었다. 꽉 찬 십오야의 달이 금빛을 반사시키는 기와의 끝에 걸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듯한 심야(深夜). 도정은 지붕 위에 바짝 엎드린 채 천이통(天耳通)을 시전하고 있었다. 바삭바삭. 웅성웅성. 나뭇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 궁녀들이 어느 비빈의 험담을 몰래 늘 어놓는 소리. 잠기운을 못 이긴 한 금의위(錦衣衛)의 짓눌린 하품소리. 소리의 향연은 먼 거리와 상관없이 고도로 집중된 귀를 타고 늘어진 비단자락처럼 속닥속닥 속삭여 온다. 이윽고, 경비가 삼엄한 3층 누각의 주변을 기운을 포착한 그의 귀는 전보다도 더 크게 열려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흐음, 그럴 거라 여겼지만… 소리마저 차단시키는 기문진식 (奇門陣式)이 설치되어 있었군. 내 이목까지 속이는 걸 보니, 상고(上古)의 절진(絶陣)일텐데……. 아무래도 황실의 인간이 아니면 편하게 들여보내 줄 생각이 없는 모양 이었다. 하긴, 온갖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쌓여있는 황궁보고가 아니던 가. (역시…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 꼬맹이를 이용해야 할지도.) 상고의 절진까지 펼쳐져 있는 경우라면, 지하보고에는 적어도 이갑자 (二甲子) 이상의 공력(功力)을 가진 황궁 고수가 떡 버티고 있을 가능성 도 높았으니까. 뒷조사로는 확실하게 후삼식이 실린 <무영검법>이 저기로 흘러 들어간 것이 맞았다. 실없게 보이긴 하지만, 자신을 상대로 헛소리를 지껄여다간 후환이 두 려운 걸 모를 리 없는 철면비투(鐵面飛偸)다. 언제까지 이런 곳에서 동정만 살필 수만도 없는 노릇이라, 도정은 내심 침음성을 삼켜야만 했다. 그렇게 잠시 고뇌에 휩싸이던 그는 갑자기 뒤를 향해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쯔쯔, 음침하게 나타나는 건 일영(一影)이나 네놈이나 어찌 그리 똑같은지… 징글맞은 놈들. ―이영(二影)이 소각주(少閣主)를 뵙습니다! 언제 나타났을까. 처음부터 도정의 등뒤에 있었다는 듯이 낮은 부복을 한 검은 복면으로 일신을 휘감은 사내. 하지만, 사내를 알고 있는 그는 거리낄 게 없었다. ―송학루에나 갈 것이지, 여기는 뭐 하러 왔누? 비록 외조라지만 황성 안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다니, 재수 없는 아버지 가 거둔 수하답게 그 실력 하나만큼은 나무랄 데가 없는 이영(二影)이었 다. 십오야의 밤이니 의뢰나 받아 망할 아버지의 쌈짓돈이나 채워 줄 것이 지, 안 하던 짓을 다 하다니… 저 징그럽게 무뚝뚝한 놈이 갑자기 철이 라도 들었단 말인가. 그러나, 상대의 시선이 물끄러미 자신의 모습에서 떨어지질 않는 걸 느 낀 도정은 이맛살을 찡그려야만 했다. ―뭐냐? ―…어… 울리시는군요. 크윽―. 그러면 그렇지. 소식이 없는 소각주의 안위가 염려되어서… 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 운 뒤, 단지 자신의 변용한 모습을 감상하기 위해 본업도 팽개치고 어슬 렁어슬렁 기어 들어온 게 분명했다. ―이영(二影), 일영(一影)이 없다고 많이 심심했나 보구나. 흐흐흐. 이영(二影)은 순진하게 보이는 어린 얼굴에 음침한 미소가 어리자, '흠 칫'하며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지금은 저렇게 와락 안아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적염랑(赤焰狼)이 어떤 인물인가. 꼭지가 돌 때는, 아버지인 무영각주마저도 일단 피신을 하고 본다는 전 설의 인물이 아니던가. 생존본능으로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스스스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는 이영(二影)의 손목을 금나수(擒拿手)로 나꿔챈 도정은 더더욱 순한 웃음 을 띄우며 그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밤은 아직도 긴데, 왜 벌써 가려고? 그리고, 잠시 후 이영(二影)은 입을 잘못 놀린 대가로 근육을 가르고 뼈의 위치마저도 바꿔 놓는다는 분근착골(分筋錯骨)의 희생자가 되어야 만 했다. 으으윽…. 아무리 끔찍한 고문수법이라도 견디게 되어 있는 무영각의 살수인 그 는 결국 비명 대신 비오듯 식은땀을 흘리는 것으로 자신의 고통을 대변 한다. ―후후후, 이백(李白)의 시라도 한 수 읊어야 될 것 같은 밤이야. 결국, 환관노릇을 하면서 쌓인 울분을 불쌍한 수하를 상대로 푸는 도 정… 아니, 서문정이었다. 靑天有月來幾時(청천유월래기시) 我今停盃一問之(아금정배일문지) 人攀明月不可得(인반명월불가득) 明行却興人相隨(명행각흥인상수) 하늘에 달이 떠 있기 몇몇 해던고 내 이제 술잔 들고 물어 보노라 사람이 달에는 오를 수 없으나 달은 저절로 사람을 따라오네. …십오야(十五夜)의 달이 아직도 은은히 빛나고 있는 그 밤에. 비틀비틀. 우물에서 퍼올린 물을 지게에 이고 갈지(之)자 형세로 위태롭게 걸어 가는 오척의 자그마한 체구의 인영. 도욱의 심부름으로 잡무(雜務)를 살피는 환관들이 주로 거하는 황성의 외딴 별채로 향하던 도정은 요 얼마간 눈에 익은 그 뒷모습를 발견하고 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무리 황궁 내의 팔십여 개에 달하는 우물의 물을 퍼나르는 게 환관 의 소임이라지만, 아직 어린 아이를 저렇게나 혹사시키다니! 무공을 익혀 날고기는 무영각의 아이들이라면 또 이야기가 틀려지지만, 아무런 힘도 없는 소년이 아닌가. 「소운!」 「아… 정(貞)이구나.」 자신을 부르는 도정의 소리에 등소운은 아는 체를 하며 무거운 지게를 잠시 땅위에 내려놓는다. 「누가 너에게 이런 걸 지고 오라고 시켰지?」 「…그게… 다들 하는 일이니까.」 머뭇머뭇 거리는 행색은 여전한 등소운이었다. 저러니, 모두가 만만하게 보고 그에게 일을 떠맡기는 게 아닌가. 「겨우 삼 년 먼저 입궁했다는 그 녀석들?」 「아… 응.」 「너는―!」 사내자식이 밸도 없단 말이냐… 라고 하려던 말은 도로 주워담을 수밖 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소운은 사내도 여자도 아닌 환관이었으니까. 어린 환관들은 먼저 입궁한 환관들의 자질구레한 시중을 새벽부터 깊 은 밤까지 드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잔다는 건 간인령에게 들어서 알고 있 었지만, 실제로 목격하게 된 기분은 상당히 더러운 도정이었다. 도욱의 세숫물이나 옷시중, 차를 따르는 일 등에도 나름대로 짜증이 솟 구치는 그임에야 두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자신이 진짜 환관이었다 해도 고만고만한 어린 녀석이 고작 몇 년 먼 저 입궁했다는 사실만으로 온갖 고된 잡무를 떠넘긴다면 사생결단을 낼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넘길 수 있는 건 역시 <무영검법>을 찾기만 하면 곧 여기를 뜨면 그만인 마음 편한 뜨내기라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 었다. 평생을 이곳에 뼈를 묻어야 되는 누군가와는 입장부터가 틀리니 까. 보는 입장으로서 아무리 답답하더라도,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 닌 것이다. 「이리 줘, 들어주지.」 「괘… 괜찮아. 너도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은 충분해.」 도욱은 왜인지 자신에게는 꽤나 너그러운 편이었다. 또, 여차하면 경공 (輕功)을 쓰면 그만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친절한 성격이 절대 못 되는 남자였다.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각주(少閣主)는 짐승 새끼와 무공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는 약한 분이지요. …라는 게 무영각(無影閣) 내의 도정의 평판이었다. 물론, 그 말만 믿고 개겼던 몇 몇의 무공을 익힌 어린애들은 그 뒤로 도정만 보면 벌벌 떨면서 오줌을 지렸다는 후일담도 전해졌다는 사족이 붙지만. 성큼성큼. 소운은 무거운 물지게를 지면서도 발걸음에 흔들림이 없는 도정의 모 습에 입을 떡하니 벌렸다. 「정(貞)이는… 대단하구나!」 「뭐어… 좀 그런 편이지.」 아무 사심 없는 어린아이의 칭찬을 듣자, 왠지 쑥스러워지는 도정이었 다. 역시, 걸어다닐 때부터 비도(飛刀)나 들고 누구 목이나 따겠다고 설 치는 무영각의 전혀 귀엽지 않은데다 싸가지까지 없는 애늙은이들만 보 다… 정말로 애다운 애를 보니 왠지 신선한 기분이었다. (음, 역시 돌아가면 쭉 세워 놓고 방긋방긋 웃는 연습이라도 좀 시켜볼까. 열 살도 안 된 것들이 가면 갈수록 표정만 살벌해져서는… 그나마 토를 단다는 게 '네, 소각주님', 그도 아니면 '아닙니다, 소 각주님'이 다인것들이 도시 뭐가 귀엽냔 말이지.) 사실, 거기에 일조를 단단히 한 게 자신이라는 자각이 당연히 없는 도 정으로서는 이 왠지 모를 뿌듯함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산뜻한 기분에 그만 구정물을 뿌린 방해꾼이 나타나고야 말았으니……. 바로, 예부의례(禮部儀禮) 원외랑(員外郞) 조헌(晁獻)이라는 자였다. 문연각(文淵閣)에서 볼일을 마치고, 동화문(東華門)으로 나가려던 그는 잠시 산책을 즐길 겸 금수하(金水河)를 따라 천천히 걸어오다 환관들의 별채에까지 이른 모양이었다. 어린 환관들이 물지게를 지고 걸어오는 걸 보았지만, 당연히 자신이 피 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구름다리의 중간을 떡 가로막고 서 있었던 것이 었는데… 본디 환관이 아닌 도정은 당연히 그를 향해 예를 취하거나, 먼 저 지나가기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깜짝 놀라 사색이 된 소운이 그의 옷자락을 채 붙잡기도 전, 조헌은 자 신을 무시하고 지나치려는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어린 환관에게 어이가 없음을 지나쳐 화가 벌컥 치밀어 올랐다. ―이런, 고약한 놈! 네놈은 위, 아래도 없단 말이냐! 아차! 기분 좋음에 취해 현재의 자신의 입장을 망각했던 도정은 내심 혀를 찼다. (검 하나도 제대로 못들 것 같은 백면서생 주제에, 바락바락 악을 쓸 기운은 있다 이거지.) 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도정이었지만, 상대는 여전히 분 이 안 풀린 듯 했다. ―네놈이 정녕 치도곤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이만큼 알아서 숙여줬으면 되었지, 아직도 남은 불만이 있단 말인가. 기분도 망쳐 놓았으니, 저 자식을 으쓱한 곳으로 슬쩍 데리고 가서 사 지를 적당히 분질러 놓을까… 라는 고민에 도정이 휩싸이는 사이, 소운 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조헌의 두 다리에 매달리고 있었다.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어르신! 아직 궁의 법도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저지른 잘못입니다! 이 필사적인 광경에 오히려 질려버린 것은 바로 장본인인 도정이었다. 하지만, 그 재수 없는 문관(文官) 자식은 어린애가 울며 매달리는데도 매몰차게 뿌리치며 되려 더 언성을 높인다. (허허, 이거 참…….) 사지절단만으로 끝내 버리기에는 참으로 고약한 작자가 아닌가. 역시, 숨통을 끊어놓은 뒤 흔적도 없이 화골산(化骨散)으로 시체를 녹여 버리 는 쪽이 좋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당장 지풍(指風)으로 육경을 그저 외우기만 한 듯한 그의 두부(頭部)에 구멍을 내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고 있는 그 잠시 사이에 도, 상황은 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르신, 제발……! ―더럽게! 놓지 못 하겠느냐! 응?! 호… 제법 반반한 얼굴을 한 환관이로고. 온갖 패대기를 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소운의 손목을 잡고 주물럭거리 는 건 또 무슨 심보란 말인가. 점입가경으로, 꼴에 완동(頑童)… 어린 남자아이를 밝히는 취미까지 고 루 겸비하신 모양이었다. ―험험, 좋다! 그 대신……. 조물조물. 말꼬리를 은근히 흘린 족제비 같은 작자의 한 손은 어느 새 소운의 엉 덩이 부근까지 내려가 그곳을 지분대기 시작한다. ―…어, 어… 어르신! 이목이 신경 쓰여 참고 있었지만, 당황한 소년의 외마디에 도정은 천천 히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소운은 수혈(睡穴)을 짚어 재운 뒤, 녀석의 살점을 수고스럽지만 일일이 저며주리라… 고 다짐한 그는 서늘 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조헌은 소년의 여윈 듯 하면 서도 야들야들한 피부의 감촉을 눈을 지긋이 감고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계획대로 소운의 수혈을 지풍으로 짚으려는 찰나……. ―아… 도정! 도정이다! 어디선가 들은 듯한 예의 옥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배시시 웃으면서 다가오는 한 소년의 얼굴과 함께―. (11) 허둥지둥. 뜨거운 화덕에 데이기라도 한 듯 조헌이란 작자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와아, 여기서 도정을 만나다니… 셋째 형님을 보러 가길 잘 했어! 황자답지 않게 팔짝 뛸 듯이 기뻐하는 주가휘(朱加輝)였다. (흥, 내 일을 방해하다니… 이 재수 없는 꼬마 같으니라고!) 도정은 등소운과 더불어 두 무릎을 꿇어 황자에 대한 예를 취하면서 내심 혀를 찼다. 일개 환관에 불과한 자신을 만난 게 무에 그리 기쁜 일이란 말인가. 도림(桃林)에서 퍼져 자고 있을 때부터 묘하다고 여기긴 했지만, 그 넓 은 황궁이 좁다 하고 매일 같이 신출귀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고 다 니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물론, 태자(太子)도 아니고 귀비(貴妃) 소생의 육황자(六皇子)이니 어 느 정도 행동반경이 자유롭다는 건 알겠지만, 이런 초라한 별채의 구석 구석까지 다니도록 시중을 드는 환관과 금의위(錦衣衛)의 소통령(小統 領)이 두 눈 멀쩡히 뜨고 묵과한단 말인가. ―그대는 문연각에서… 아, 원외랑(員外郞) 조헌(晁獻)이군요! ―예, 전하… 그… 그렇사옵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손바닥을 '짝'하고 치며 반색을 띄우는 주가휘. 민가의 아이라면 그지없이 자연스러운 태도지만, 궁의 법도를 따진다면 어딘가 경망스러운 구석이 없잖아 있는 황자였다. 아니나다를까, 있는 듯 없는 듯 뒤에 시립해 있던 중년의 환관이 앞으 로 한 발 나서며 질책의 목소리를 띄운다. ―전하, 행동을 자중하심이……. ―음, 알았어, 숙고(宿顧). 째진 뱁새눈을 한 숙고(宿顧)는 동창(東廠)의 환관으로 보였다. ―도정이… 원외랑과 친분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그… 그게… 전하……!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는 주가휘의 시선에 조헌은 내심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별 볼일 없는 저 어린 환관이 기문왕자가 친히 이름을 기억할 정도였 다니! 기문당의 환관은커녕 허드렛일이나 하는 아이가 분명할진대, 정녕 귀신 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먼저 죄를 지은 건 저 성 질머리 있어 보이는 어린 환관이 분명하지만… 황자의 태도로 보아서는 결코 그 말을 믿어줄 성싶지 않았다. 행여나, 저 녀석이 그릇된 고자질이라도 한다면……?! (12) 그런 조헌의 생각에 부채질이라도 하듯 주가휘는 도정의 오른팔을 두 손으로 꼬옥 잡으며 이쪽을 말똥말똥 바라다본다. ―그… 그것이……, ―그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그만 보내주어라, 가휘야. 일장쯤 뒤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에 조헌은 살았 다는 듯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고는 허둥지둥 장내를 빠져나갔다. 이 기회를 놓치면, 주가휘의 질책 아닌 질책을 벗어나기 힘들 것 같았 기에―. ―형님! ―셋째 형님은 만나 뵙고 가면서 나는 모른 척이더냐. 빙그레 웃으며 다가온 약관(弱冠)의 헌헌장부(軒軒丈夫)는 사황자(四皇 子) 주가진(朱加眞)이었다. 덕분에, 또 빌어먹을 예를 갖춘다고 다시 땅바닥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 던 도정들이었다. ―호오, 이 아이가 네가 말하던 도정이란 아이냐? ―네, 형님! 흠칫―. 도정은 황자들의 대화에 미간 사이를 좁혔다. 도대체 무슨 말들을 주고받았기에, 생전 보지도 못한 넷째 황자라는 작 자가 자신을 안단 말인가. 아무리 더듬어 봐도, 주가휘가 남들에게 친하다고 떠들 만큼의 친분을 쌓은 기억이 도통 없었던 그였다. ―어디, 고개를 들어보아라… 흠, 그렇구나. 가휘의 마음에 들만하게 생겼군… 오, 곁의 너도 나쁘진 않구나. 둘 다 내가 거하는 진무당 (眞武堂)으로 오지 않겠느냐? ―혀… 형님! 도… 도정은……! 오고가는 대화가 여전히 심상치 않음인지, 소운이 떨리는 손을 들어 도 정의 소매를 꽉 움켜잡는다. 여섯째 황자도 괴이하다 여겼더니, 넷째 황자는 한술 더 뜨지 않는가. 후궁을 낙점하는 것도 아니고, 남의 얼굴을 따지기는 도시 왜 따진단 말인가. 아무래도, 저 재수 없는 원외랑 뿐만 아니라 이 황성에는 완동의 취미 를 가진 작자가 넘쳐나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눈 깜짝할 사이에 소운은 사원국에서 진무당이라는 파급적인 승급을 하고 말았는데……. 도정은 주가휘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쳐, 다행히 자리보전을 할 수 있 었다. 마치, '나, 잘했지'라는 얼굴로 방실방실 웃는 가휘의 면전에 대고 차마 환관의 주제로 화를 내기도 또 그런지라… 결국. 어깨를 늘어뜨리는 걸 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도정이었다. ―으음… 역시 무림인들이 관(官)을 멀리하는 이유가 있었군 …역시 옛말은 그른 게 없는 법… 이었다. (13) 츠츠츠츠―. 지독한 돌개바람이 뺨을 에일 듯이 할퀴어 오며 미친 마귀같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한 발자국을 떼면 검푸른 아가리를 벌린 바다가, 또 옆으 로 한 발자국을 떼면 천길 낭떠러지가 '어흥'하며 달려든다. 미친 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이 사방팔방으로 휘날리는 속에서 도정은 전방을 주시하는 눈길을 떼지 않았다. (으음, 지독하군. 생문(生門)은 처음부터 논외였다는 건가.) 황궁보고(皇宮寶庫)의 사면에 쫘 깔린 금의위(錦衣衛)를 속이는 건 처 음부터 생각했듯이 그닥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또 반면에 고려의 대상이었던 기문진식(奇門陣式)이 지금 그를 심난하게 만들고 있었다. 상고의 절진(絶陣)이라는 건 짐작했지만, 설마… 진 속에 또 다른 진을 겹겹이 설치했을 줄이야! (누군지 몰라도, 정말 심보 한 번 고약하군. 이건 들어오는 놈은 무조건 죽이겠다는 의지밖에는 없으니.) 존재하는 것 모두가 사문(死門)이었다. 도대체가, 진을 설치할 때의 기본예의가 되어있지 않았다. 최소, 숨통을 쉴 수 있을 정도의 휴문(休門)이라도 하나 둘 정도 틔어 주면 거시기에 부스럼이라도 쓴단 말인가?! (고약해! 고약해! 여인네 손길 한 번 못 잡아본 군내 나는 늙은이가 세상 남정네는 여기 와서 다 죽으라는 심보로 만든 게 분명해!) 처음에는 만독청화진(萬毒靑花陣)에 팔진도(八陣圖)를 응용한 거라 여 겼지만, 웬걸… 역진(逆陣)까지 점잖게 포진을 시켜준 바람에 기껏 휴문 (休門)이라 여겼던 곳이 사문(死門)으로 돌변해, 자칫 발을 잘못 디뎠으 면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했을 뻔한 도정이었다. (…할 수 없지.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날 수밖에!) 도정은 누가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어설픈 춤사위라도 벌리는 듯한 형 세로 이리저리 발을 바꾸면서 진을 빠져나갔다. 천변만화한 진 안에서 다시 되돌아나간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그 정도의 대비도 하지 못한다면 이곳에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리 라. 후우. 잠영술(潛影術)을 이용해 또 다시 기척을 죽이고 금의위의 철통같은 수비 속을 헤치고 나온 도정은 한 전각의 지붕 위로 올라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일이… 잘 안 되시나 보군요, 소각주(少閣主). 기다렸다는 듯이 등뒤에서 음침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왠지 남아있 던 기력마저도 쭈욱 빠지는 기분인 도정이었다. ―어차피 쉽지는 않을 거라 여겼으니까… 저쪽 사정은 어때? ―혈막의 소막주라면… 산동(山東) 태안(泰安)까지는 행적을 확인했습니다만……. ―흥, 냄새를 맡았나 보군. 놈의 시퍼런 눈탱이를 생각만 하면, 입에 든 밥알까지도 모래알처럼 느 껴지는 그였다. 모친이 색목인(色目人)인 까닭에, 중원인답지 않은 푸른 눈 덕분으로 별호마저도 청안(靑眼)인 호지연. 놈이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눈치를 못 채고 있다면… 호리(狐狸)라는 남은 별호를 갈아 치워야 했으리라. ―됐으니, 그 시커먼 면상 좀 치우고 가봐. 스스슥―. 여전히 귀신처럼 모습을 흐리며 사라지는 이영(二影)―. ―쯔쯔, 쥐도 안 파먹는 저 면상하고는… 에잇, 이놈이나 저놈이나! 저러니 어디 가서도 꼭 어둠의 자식이라는 덜 떨어진 소리나 처듣는 게 아닌가. 어쨌거나, 결국……. ―내키지 않지만, 역시 저 괴이한 왕자를 구슬리는 걸로 낙찰이군. 어린애를 이용한다는 건, 역시 뒤가 기분 나쁘긴 하지만… 더 이상 시 간을 지체할 수도 없는 노릇. 저 고약한 진(陣)을 상대하는 건 쓸데없는 지모와 체력의 낭비니까 말 이다. (14) 뽀롱… 뽀로롱. 영산홍(映山紅) 가지마다 흐드러지게 핀 흰 오판화 너머로 펼쳐진 푸 른 하늘을 새들이 부지런히 날개짓을 놀리고 있었다. 조금은 나른한 기운이 묻어나는 오시초(午時初)―. 통천관(通天冠)에 용포(龍袍)가 아닌, 적당히 편한 차림새의 궁의(宮 衣)를 걸친 기문왕자 주가휘는 도정이 부쳐주는 부채질에 눈을 가느스름 하게 뜨고는 수련이 떠다니는 연못의 팔각정자 난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 대어 있었다. 「팔 아프지, 도정? 이제 그만 부치도록 해.」 그렇게 걱정되면 처음부터 시키지 말았어야지! 무림인인 도정에게 있어 이 정도의 부채질은 하루종일이라도 아무렇지 않지만… 역시 기분상으로 썩 유쾌하지는 못한 일이었다. 무영각의 인간들이 지켜보고 있었다면, 다들 입에 게거품을 물고 간질 증세를 보였으리라. 「도정도 기문당(琦文堂)에서 같이 지내면 좋을 텐데, 숙고(宿顧)가 여간 깐깐해서 말이지.」 숙고라면… 예의 뱁새눈의 환관을 일컬음이었다. 황제 직속의 동창(東廠) 환관답게, 적잖은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 그는 어린 황자의 일신상의 문제 정도는 모두 제 선에서 해결하고 있는 듯 했 다. 「하긴, 숙고의 잔소리에 시달리느니… 도공공의 아래에서 지내는 게 도정이 편할 거야.」 말은 그렇지만, 이렇게 매일 불려와 황자의 시중을 들고있는 마당에 딱 히 구분이 가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하긴, 황자를 적당히 구슬려 황궁보고로 한 번쯤은 들르게 만들 생각인 그에게 있어 나쁜 상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섬세한 연화무늬가 새겨진 가교 아래로 초록빛 물이 햇빛에 부서져 내 리는 광경은 저절로 감탄을 자아낼 만큼 우아한 향취를 느끼게 한다. 게다가, 어디선가 기분마저 상쾌해지는 향기가……. 도정은 어느 새 자세를 바꿔 자신의 무릎을 얌체처럼 베고 있는 주가 휘의 몸에서 그 향내가 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울금향(鬱金香)은 백화문(白花紋)의 찻잔에서 묻어나는 잔향과 어울려 그윽함을 더하고 있었다. (허, 참… 여인들이나 쓸 울금향이라…….) 무림인인 그로서는 황실 인간들의 취향을 파악하기가 심히 어려웠다. 「무슨 생각중이야, 도정?」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주가휘의 두 눈동자는 푸른 기가 도는 흰자와 더 불어 새까맣게 반짝거린다. 순한 강아지와 같은 눈. 정말로 꼬옥 안아주고 싶을 만큼의 앙증맞음마 저 느껴진다. 저도 모르게 주가휘의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어 주려던 도정은 곧 그 것이 지극히 무엄한 행동임을 깨닫고는 반쯤 올라간 손을 슬그머니 내려 놓았다. 그저 순진하게만 보이는 이 황자가 실은 채 열 살도 되기 전에 사서오 경(四書五經)과 육도삼략(六韜三略)을 뗀 신동이라니… 정말로 사람은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전하.」 그나저나, 대체 언제쯤 황궁보고에 대해 운을 뗄 수 있을지……. 잠시 난감함에 미간을 찌푸리는 도정은 이쪽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 에 고개를 들었다. 연화정(蓮花亭)에서 식사를 하겠다는 황자의 의사에 맞춰 궁녀들이 준 비를 해온 것이었다. 순식간에, 산해진미가 눈앞에 펼쳐지고… 극구 사양하려는 도정의 손에 기필코 젓가락을 쥐어주는 주가휘였다. 할 수 없이, 접시에 손을 가져가던 도정의 안색은 어느 순간 급변했다. ―이… 이건…?! 그리고, 주가휘의 몸에서 나던 울금향의 정체에 대해 갑자기 파악이 된 그이기도 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주가휘는 여간해서 젓가락질을 하지 않는 도정의 태도가 의아했던지, 고개를 갸웃한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거야? 딴 걸로 바꿔오라고 할까?」 「아… 아니, 괜찮습니다만… 늘 이런 걸 드십니까?」 「응, 왜, 정말 젓가락도 안 갈 만큼 당기지 않아?」 그 눈동자에 낙담이 어리는 걸 보고, 황급히 고개를 내저어야만 했던 도정이었다. 그러나…… ―너 같으면, 독이 든 음식이 입에 댕기겠냐! (15) 그러했다. 음식 전반에 걸쳐 참으로 골고루 뿌려진 독을 보고 입맛이 댕긴다면, 타고난 만독자(萬毒子)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리라. 고도의 살수수업을 거친 자라지만, 알아차릴 수 있는 극소량의 독. 물론,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독이라고까지 할만한 게 못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간 음독 시에는 기력이 쇠하면서 점점 바짝바짝 말라가 다 종내 죽음에 이르는 독인 것이다. 병사로 처리하기엔 제일 좋은 방법 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죽은 시체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으니까. 도대체 얼마동안 매일 이런 걸 먹고 지냈단 말인가. 도정은 은근슬쩍 황자의 손목을 잡아갔다. (그렇군, 맥의 흐름이 불규칙해… 적어도 일 년 이상은 중독이 된 상태다.) 그나마 극소량이기에 아직 남은 일 년 정도를 더 채워야 병사에 이른 다. 어쩐지, 나이에 비해 자그마하다고 여겼더니! (…이러니, 아무리 좋은 걸 먹고 마셔도 제대로 자랄 리가 있나.) 도정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주가휘는 고개를 계속 갸웃거 리기만 한다. 「도정, 속이 불편하기라도 한 거야? 이것 좀 먹어 봐.」 어쨌거나, 이 독을 장기간 복용한 사람에게서는 한 가지 특징이 나타나 는데… 그것이 바로 은은한 울금향이었다. (황망하군. 암살이유에 가장 근접한 거라면, 황태자 자리를 노리는 누군가가 나머지 황자들을 제거하기 위함인데… 아무리 그래도 여 섯째 황자가 아닌가. 서열이 멀어도 한참 멀어!) 권모술수와 암투가 판을 치는 무림 못지 않게 비정한 골육상쟁이 없었 던 적이 없었던 거대한 황금(黃金)의 성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지만,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아들이 아비를 죽이 고, 동생이 형을 해하는… 그런 잔혹한 피의 법칙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이런 어린아이조차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다니…….) 입맛이 썼다. 자신도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이러고 있는 셈이었으니… 결국, 황자 의 주위에는 진심으로 위해주는 이들이 전무한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아 닌가. 적어도 매끼 음식에 계속 독을 탈 수 있다는 건 아주 가까운 측근의 짓이라는 소리니까. 왠지 안쓰러운 마음에 도정은 저도 모르게 이런 제안을 입 밖으로 꺼 내고 말았다. ―앞으로는… 제가 전하의 식사시중을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 '응'이라고 크게 대답한 주가휘였다. 해독제를 당장 구하기는 어려운지라, 적당히 안 뿌려진 부위만을 골라 주가휘의 접시에 담아주면서도 도정의 눈빛은 계속 번득이고 있었다. (뭐어… 원하는 게 있으니, 이 정도 뒤를 봐주는 건 괜찮겠지.) 적어도 떠나기 전까지는, 독을 타는 녀석을 잡아들여 그 배후를 좀 주 물러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후환이 덜할 테니까. (16)∼(19) ―말씀하신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냐? 암굴의 시커먼 편복처럼 처마 끝에 거꾸로 매달린 이영(二影)의 반문에 도정은 한쪽 눈썹을 휘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에게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커억! 갑자기, 박쥐에서 배가 눌러 터진 개구락지 형세가 된 무영각의 일급살 수는 자신의 머리를 밟고 선 이에게 항의의 비명을 내질렀다. 「호오, 내가 뭘 너무 한다는 거지?」 「도… 독을 쓸 생각이 아니셨습니까? 그래서 해독제도……!」 「쯔쯔, 매를 벌어라! 매를!」 치명적인 급소만 골라 천근추(千斤墜)의 수법으로 자근자근 밟아주는 도정의 친절에 그는 부르르 사지를 떨어야만 했다. 「네놈은 그래서 일영(一影)의 발바닥만 핥게 되는 거다. 도통 발전이라는 게 있어야지,」 「크윽… 소각주(少閣主)! 왜, 거기서 놈의 얘기가 나오는 겁니까!」 「…그러니까, 그게 네 한계라는 거다.」 밟히는 와중에도 억울하기 그지없는지, 부지런히 입을 놀리는 이영(二 影)에게 코방귀를 뀌어주고는 도정은 손에 든 옥병의 내용물을 확인했 다. 「헛소리는 집어치워, 황자는 이미 중독되어 있던 상태니까.」 「그… 그럼, 설마… 누군가가 암살을 꾀하고 있다는?!」 「그런 셈이지. 공짜로 가져가는 건 좀 찜찜했으니, 이 정도면 대가로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 「역시… 무공을 모르는 어린애들에게는 다정하… 커어억!」 「살수가 그리 말이 많으면 제명에 못 죽는다, 이영(二影).」 장황하게 대답을 늘어놓던 자신의 실책은 까맣게 잊었는지, 애꿎은 수 하만 늘씬하게 패대는 도정이었다. ―가져온 수고를 생각해서 이쯤 해두지. 이미 거품을 물고 사지경련을 일으키는 인간을 앞에다 대고 할 소리가 아니었지만, 그는 산뜻하게 그렇게 말했다. 찰랑이는 옥병을 품속에 갈무리하면서―. 뜨거운 열기로 발갛게 달아오르는 아궁이 앞에서 간인령은 자신의 키 만한 대형주걱으로 솥 안의 국수를 휘휘 내젓고 있었다. 똑똑. 비지땀이 이마에 맺혀 턱까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금새 증발해버릴 정도로 안은 무더웠다. 「한동안 기운이 없다 했더니, 이걸 하느라 그랬군.」 「말시키지 말고 너도 계속 저어.」 「도와주는 사람에게 할 소리가 아니잖아.」 「시끄러! 진무당(眞武堂)에 들어가 코빼기도 안 보이는 소운이나, 기문당(琦文堂)에 아예 자릴 튼 네놈은 내 고생을 알 리가 없어!」 곁에서 다른 솥의 국수를 젖고 있던 도정은 잠시 손길을 멈추고는 인 령을 쳐다보았다. 「훗, 많이 아니꼬왔던 모양이군.」 「에… 에잇, 누… 누가?!」 발끈하는 모양새가 이미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정말 애들한테 이런 무지막지한 노동만 시키다니… 없는 것들이 더하단 말이야.)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런 아궁이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건 전부가 또 래의 아이들뿐이었다. 「그래도… 빨리 하지 않으면, 다들 점심을 거를지도 몰라.」 주가휘와 같이 있다 보니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나오는 산해진미(山海 珍味)가 이제는 지겨운 도정과는 달리 허드렛일을 하는 환관들의 식사는 인령들의 손에 달려있는 셈이었다. 「이것도 내가 저을 테니, 너는 조금 앉아서 쉬어.」 입으로는 그랬어도, 꽤 힘들었던 탓일까. 간인령은 금새 자리에 푸욱 주저앉아 몸을 추욱 늘어뜨린다. 도정은 그런 인령을 향해 몰래 숨겨 가지고온 오리구이를 내밀었다. 원래는 예의 독약이 양념처럼 들어가 있었지만, 해독제로 중화를 시킨 거라 아무런 해가 되지 않았다. 눈앞에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오리고기가 어른거리자, 인령은 누가 빼앗 아가기라도 하듯 덥석 집어들더니 게걸스럽게 먹어대기 시작한다. (역시 애들은 잘 먹여서 키워야 한다니까.) 나중에는 손까지 쪽쪽 빨아가며 먹던 인령은 어느 정도 배가 불러오자, 기운이 생겼는지 다시 주걱을 젓는 일에 매달린다. 「그래도 내 딴에는 걱정을 하고 있단 말이야. 여섯째 황자님은 아직 어리니까… 상관이 없겠지만, 넷째 황자님은… 그… 그러 니까, 꽤 주색(酒色)을 밝히시게 보이잖아. 가뜩이나, 약한 소 운이 무슨 일을 당할지…… 에에잇!」 이래저래 혼자 다니는 도정과는 달리, 언제나 다른 환관들과 같이 지내 는 인령은 그 사이에 황궁의 생활에 대해 잡다한 일들을 많이 알게 된 모양이었다. 황자들이 후궁의 궁녀를 쉴 새 없이 탐할 것 같아도, 혼례를 올리기 전 에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속사정이 있다던가. 그래도, 혈기왕성한 나이 때다 보니… 혼례 전에는 대부분 얼굴이 반반 한 어린 환관들을 대신 품에 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전환관으로 뽑 히는 이들 대부분이 용모를 우선으로 한다던가. 「소운은 우리가 보기에도 꽤 생긴 게 곱잖아. 그래서, 빠르든 늦든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에휴.」 입궁하자마자 터놓고 지낸 사이라 그런지, 어지간히 소운을 챙기는 간 인령이었다. 「듣자니, 넷째 황자님이 너도 거두려고 했다면서? 소운은 이해가 가지만, 도정 너는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 취향이야.」 순간, 도정은 앞으로 오리구이 따윈 절대로 챙겨오지 않겠다는 굳은 결 심을 단단히 해야만 했다. 으음―. 물론, 소운의 일은 그 역시도 조금은 걱정이 되고 있었다. 천생 돌봐줘야만 될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아이였으니까. 도정은 무어라 또 늘어놓는 인령의 손에 쥐고있던 주걱을 넘겨주고는 발걸음도 가볍게 그곳을 나섰다. 뒤에서 터지는 이런 소리를 무시하고서―. ―도정! 도정, 거기 서! 술 누룩도 같이 펴주기로 했으면서――! 깊은 밤이었다. 이지러지는 편월(片月)이 머리끝에서 은은하게 부서져 내리는. 그리고, 부신약영(浮身躍影)의 경공으로 전각과 전각 사이를 마치 한 마리 야조(夜鳥)처럼 재빠르게 이동하는 신형이 하나. 흑의인은 어느 순간, 목적하던 장소에 이르렀는지 조심스럽게 기척을 지우고 흐릿하게 불을 밟힌 격자창 안으로 숨어들었다. 금빛 테두리의 편액에 쓰여진 바에 의하면 이곳은 진무당(眞武堂)이 분명할진대……. (황궁보고만큼은 아니지만, 여기 경비도 만만치가 않군.) 모처럼 변용술을 사용한 게 아닌, 본디 육척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는 도정은 어둠과 동화되어 실내의 전경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용(易容)과 축골공(縮骨功)을 시전하고 있지 않아서인지, 신체가 날 아갈 듯이 가뿐한 도정은 이내 붉은 휘장이 드리워진 침상에 신경을 집 중시켰다. 아… 으응. 묘하게 귓가를 자극해오는 신음성에 도정은 흠칫했다. (제길, 역시나인가?!)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지며 손안에 힘이 들어간다. 딱히 표현하자면, 시집간 딸의 첫날밤을 훔쳐보게 된 홀아비의 심정이 랄까, 어쩔까. 고이고이 키워놨더니 어느 도둑놈이 낼름 집어 가는 기분 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기분 더럽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왕지사 여기까지 발걸음을 옮겼으니 그냥 빈손으로 가기에도 뭐한 터라 도정은 슬금슬금 천장에 인면지주(人面蜘蛛)처럼 들러붙어 소 리의 진원지로 다가갔다. 아니나다를까,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아아… 저… 전하, 제발……. ―헉… 헉… 조금만 버티거라. 곧……. 땀에 젖은 소운의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어 붉게 상기된 그곳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고 있었다. 마른 듯 하면서도 소년 특유의 색기가 느껴지 는 그 위를 뒤덮고 있는 건 역시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사내의 몸이었다. 가쁜 한숨을 내뱉고 있는 남자는 사황자(四皇子) 주가진이었다! 의복을 몸에 걸친 상태로 허리를 부지런히 놀리고 있는 그의 행색으로 보건대, 하루 이틀에 걸친 솜씨가 아니었다. 아직 혼례 전이니, 저런 익숙한 몸놀림은 아무리 생각해도 환관들을 상 대로 얻어냈다는 결론밖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다. 아아… 아아앙. 며칠 사이에 벌써 길이 들었는지, 황자의 허리에 맞추는 소운의 움직임 도 쾌감의 여운을 쫓아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걱정을 한 쪽이 되려 미안하지 않은가. 그들의 방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남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 아 보일 정도였으니까. 철벅철벅 습한 피부끼리 마찰하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그 속에서 도정은 심히 민망해짐을 느꼈다. 어쨌거나, 엿보는 취미는 없으니… 이쯤에서 사라지는 게 상책일 지 도……?! 헉―. 순간, 도정의 몸은 저도 모르게 바짝 얼어붙었다. 마주친 것이다! 허리를 들썩거리기 바쁜 그 누군가의 눈과 말이다! ―…설마… 잘못 본 거겠지?! 왜, 아니겠는가. 그는 잠영술(潛影術)을 펼치고 있는 중이었기에, 범인의 눈에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눈에 띌 리가 없는 것이기에. 그런 마당에, 정통으로 눈길이 마주친다는 게 어디 말이 되겠는가 말이 다. 하지만…… 싱긋―. 상대가 마주보며 웃기까지 한다면, 역시 잘못 본 걸로 치부하기에는 문 제가 심각하지 않은가. 복면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맨얼굴을 멀쩡히 드러내고 있었던 도정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 아아응 하지만, 착각이었을까. 소운의 신음성은 더 세차게 울려 퍼지고, 상대의 허리 움직임도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잘못 본 거겠지, 역시…….) 그러나, 뭔가 묵직한 것이 내리누르는 기분이었다. 그 찜찜함에 못 이겨, 결국 진무당을 부리나케 빠져나가고만 도정이었 다. 물론, 낮게 파고드는 이런 한마디를 귀담아 들었다면… 결코, 그대로 가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간만에 보는 먹음직스런 불청객이군. 오늘은 그냥 보내주지만 이 다음은 장담할 수가 없겠는걸. 세월을 느끼게 하는 아름드리 나무들과 기괴한 형태의 바위들, 마치, 별유천지에 온 듯한 기화요초의 방향이 흐드러지는 어화원(御花 園)의 중심에는 화재로부터 궁궐을 보호해준다는 수신(水神)의 제사를 드리는 흠안전(欽安殿)이 직사각형의 성벽에 둘러싸여 경건한 자태를 드 러내고 있었다. ―오늘은 도사(道士)들이 보이지 않으니까… 우리 저기로 한 번 올라가 보자, 도정! 도정은 무슨 짓궂은 장난이라도 획책하는 듯 눈을 반짝이는 황자 주가 휘를 향해 잠시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저곳에 말입니까?」 떨떠름한 목소리가 가리키는 곳은 어화원의 동북쪽이었고… 거기에는 황제와 황후가 중양절에 오른다는 인공가산인 퇴수산(堆秀山)이 있었다. 「별 것도 아닌데, 말코 도사들이 시끄럽게 군단 말이야. 저기 오르면 황궁 밖의 풍경까지도 잘 보이거든.」 바깥이 잘 보이는 건, 남쪽의 신무문(神武門)에 가까운 탓이리라. (뭐어… 아무래도 좋겠지만…….) 어젯밤의 찜찜한 기분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터라, 도정은 주가휘가 잡 아끄는 대로 퇴수산을 향했다. 황자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다니던 금의위 의 소통령은 거의 포기를 한 모양인지 그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역시 여기서 보는 풍경이 제일이야!」 퇴수산 정상에 위치한 어경정(御景亭)의 난간에 의지한 채로, 주가휘는 눈 위에 손을 올리고는 저 아래로 펼쳐진 광경에 감탄성을 자아낸다. 청량감이 느껴지는 바람이 비파를 타듯 귓가를 싸아싸아 스치고 지나 간다. 「어때, 도정도 기분이 좋지!」 배시시 웃으니, 저절로 한쪽 입가에 보조개가 패이는 황자였다. 「예, 전하.」 「음, 역시 도정은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어. '와아, 저도 너무 좋아요!' 정도는 해봐.」 도정의 초연한 태도가 왠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지, 주가휘는 한숨을 포옥 내쉰다. (이 정도면, 살수치고는 상당히 잘 웃고 있는 겁니다만…….) 그리 시일이 흐른 듯 싶지도 않은데, 홍장요요(紅牆繞繞)한 담장들 너 머로 보이는 전경이 새삼스럽다. …역시 생각보다도 여기에 오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곳에 오면 도정도 틀림없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도정이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말해 봐! 내가 구경시켜 줄 테니까! 도정은 환관이니까, 잠시동안이라면 후궁도 데리고 가줄 수 있어! 거기에는 미녀들이 정말많거든! 저 멀리 서역에서 온 …….」 「…저어… 황궁보고(皇宮寶庫)에는 저희 같은 것들은 평생가 도 구경조차 못해볼 보물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황궁보고?! 거기를 구경하고 싶은 거야?」 「…역시 힘들겠지요.」 「거긴… 장소가 장소니 만큼 부황(父皇)의 윤허가 있어야지 나…….」 말꼬리를 흐리며 난감해하는 주가휘의 모습에 도정은 짐짓 얼굴 가득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니나다를까, 그 모습이 여간 안되어 보였던지 주가휘는 도정의 두 손 을 꽉 쥐며 힘차게 이리 말하는 것이었다. ―좋아! 내가 아바마마를 조르면 어찌 될 터이니… 꼭 데리고 가 줄게! 후후후. 긴 기다림 끝에 대어를 낚은 강태공의 심정이 이러할까. 도정은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떡였다. 소운의 일도 있고 해서 그런지, 이 이상 환관의 모습으로 지내는 게 왠 지 거북스러워지던 그였으니까. 운을 먼저 띄어준 황자가 오늘따라 그렇게 이뻐 보일 수가 없었다. 배시시 미소지을 때마다 붉은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하얀 이는 단순호 치(丹脣皓齒)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고, 옷깃 사이의 뽀얗고 긴 목은 울금향과 더불어 묘한 기분을……?! ―이런, 내가 무슨 생각을……?! 필시, 어젯밤의 영향이 틀림없었다. 주가휘의 얼굴 위로 신음을 흘리던 소운이 겹쳐 보이는 건! (역시… 이런 곳에 너무 오래 있어서 좋을 건 없겠어!) 완동의 취미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황궁의 생활에 젖어들 다간 자신까지도 이상한 쪽으로 물들지 말란 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무릇, 사람의 일이란 자신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정말로 장담할 수가……. (20) 멈칫. 도정은 기문당(琦文堂)의 정자 앞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고 있는 한 인영을 발견하고는 다반(茶盤)을 들고 가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 다. ―아니, 저 놈의 인간은 왜 이곳에 온 거지?! 사황자(四皇子) 주가진의 태평한 그 모습에 적잖이 마당찮음을 느끼면 서도 멈췄던 걸음을 그를 향해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 다반 위의 차는 자신을 찾아온 그와 즐기기 위해 주가휘 가 준비시킨 것이리라. 어쨌거나, 황자답게 체통을 지켜 얌전히 앉아나 있을 것이지… 똥마려 운 개처럼 왔다갔다 정신없게 서성거리는 건지……. 게다가, 주가진을 따라온 듯한 환관들 중에는 소운의 모습은 도통 보이 지 않고, 대신 좀 더 예쁘장한 소년이 그의 뒤에서 얼굴을 숙이고 있었 다. (며칠이 지났다고, 벌써 다른 녀석을……!) 저도 모르게 다반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이내 정색을 하고 정자 안에서 이쪽을 향해 배시시 웃고 있는 주가휘를 향하려고 했다… 했으 나……?! 어헉! 순간, 자신의 허리를 감싸안는 커다란 손길에 내심 경악성을 발한 도정 이었다. ―오오, 너는 그 때의 어린 환관이로군! 여전히 가휘의 마음에 들고 있나 보구나. 허리를 숙인 주가진의 싱글거리는 면상이 시야에 가득 차자, 도정은 험 악하게 노려봐 주었다. 「음음, 역시나 제법 성깔이 있어… 좋아, 좋아!」 도시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알 수가 없는 황자였다. 기분 탓일까. 허리를 슬쩍슬쩍 더듬는 그 손길에 예의 밤일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 간다. 침상이 요통을 치도록 힘차게 움직이던……. 결국, 오슬오슬 소름이 돋으려는 걸 억지로 가라앉히고 아무렇지도 않 은 듯 살짝 고개를 숙인 그였다. 「가만… 음, 네게 혹시 형이 있더냐?」 움찔―.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 도정은 미간 사이를 좁혔다. 왜인지 점점 기분이 나빠지려 하고 있었다. 「…없습니다, 전하.」 「그래, 그럼… 사촌이라도?」 「…사촌누이는 있어도 형님은…….」 「그래, 그거 아쉽구나.」 …도대체, 뭐가 아쉽다는 말인가?! 선문답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도정은 이 황자의 심중을 도저히 짚을 수 가 없었다. 눈앞의 어린 환관이 난처해하거나 말거나, 주가휘는 그 뺨에 손을 대고 는 요리조리 돌려보더니… 역시나 알 수 없는 소리를 다는 것이었다. 「한 오 년쯤 기다리면 되려나… 아니, 환관은 그런 풍모로 자랄 수가 없지. 아쉽구나, 정말 아쉬워.」 황자고 뭐고 간에 암중에 살수(殺手)를 쓸까, 말까… 고민하던 도정의 고민을 헤아렸는지 어땠는지 주가휘가 다시 정자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이렇게 소리쳤다. 「형님, 차가 식습니다! 도정을 그만 놓아주시죠.」 그러자, 겨우 도정을 손에서 놓은 그는 천천히 정자 위로 올라서면서 이런 중얼거림을 남기는 것이었다. ―흐음… 그 때의 밤손님과 꽤 닮았다고 여겨 좋아했건만.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였지만, 불행히도 무림인인 도 정에게는 이 정도의 거리라면 결코 흘리기 힘든 소리였기에… 그는 하마 터면 들고 있던 다반을 손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설마… 그가 무공을 익혔단 말인가?! 그 날, 눈이 마주친 게 결코 착각이 아니라면 그것 외에는 설명할 방도 가 달리 없었다. 「어디, 그럼 아우와 차라도 들까… 필시 이 형님이 좋아하는 용정차(龍井茶)렷다!」 「예, 형님. 항주(杭州) 서호(西湖)에서도 가장 최상급으로 친 다는 사봉용정(獅峰龍井)입니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황자는 태평하게 차 에 대한 한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도정이 직접 차를 따르는 걸 느긋하게 즐기기까지 하면서. 그 와중에도 은근슬쩍 여전히 허리를 스치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끼며, 무공을 익혔거나 말거나 궁문을 나서는 그날에는 이 손을 분질러 놓겠다 고 결심을 확고히 굳히고야마는 외양만큼은 어린 환관이었는데……. ―전하, 왜 그리 기운이 없으십니까? 서탁 위에는 치다만 난(蘭)이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붓을 든 하얀 손은 허공에 잠시 멈춰진 채 머뭇거리더니, 이내 '탁'하고 쥐고 있던 걸 곁에 내려놓는다. 무릎을 꿇은 채 먹을 갈던 도정 역시 그 손길을 거두고, 주가휘의 신색 을 살폈다. 「오늘도 졌어… 온옥(溫玉)까지 걸었는데.」 청화매병(靑花梅甁)에 비친 주가휘의 얼굴은 시무룩하기 그지없었다. 그때서야, 도정은 전후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잘 훈련시킨 메뚜기들을 싸우게 해 돈을 거는 내기가 황실과 고관대작 들 간에 한창 성하고 있는 요즘이었다. 예전에는 귀뚜라미, 즉 청렬이 애호를 받았으나 작금에는 투기(鬪氣)가 강한 풀무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 비황투(飛蝗鬪)라 불려지고 있 었다. 「오왕부(吳王府)와의 내기에서 셋째 형님만 빼고는 다들 잃었지. 벼와 콩뿐 아니라 삼까지 충분히 먹이라 일렀거늘, 내 비황은 힘을 하나도 못써대니…….」 훈련을 잘 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좋은 비황을 구해야만이 제대로 싸우기라도 하지 않겠는가. 「…아끼던 두 마리 다 지쳤는지 죽어 버렸어.」 이제는 주가휘의 낙담이 손에 잡힐 듯한 도정이었다. 비황들을 잃어 버렸다는 사실보다도 어쩌면, 오왕부에 패했다는 사실이 어린 황자에게 더 마음 상하는 일이었으리라. 이번에도 저도 모르게 그런 황자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고픈 욕구 가 일었지만, 도정은 꾸욱 눌러 참았다. 「…다음에는 이기실 수 있을 겁니다.」 「응,」 내심은 아닌 듯 했지만, 어쨌거나 도정의 말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는 황자였다. 「아… 그래! 아바마마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조만간 황궁보고에 가볼 수 있을 거야.」 자신의 상심을 감추고 웃어 보이는 주가휘의 미소에 도정은 순간적으 로 눈앞이 아찔해옴을 느꼈다. 마치, 수만 가지 꽃이 일제히 만개하는 기분이랄까. (…여… 역시, 조심을 해야겠어!) 결단코, 황궁의 독(毒)에 침범당해서는 아니 되었다! 아무리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의 미인이더라도 아직 어린 황자… 게다가 사내가 아닌가. 자칫, 미색에 홀려 일을 그릇칠 수는 없는 법!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부여잡는 도정… 아니, 서문정(西門 貞)이었다. 웅성웅성. 부지런히 사람들이 오가는 관도(官道). 바람을 타고 바다 특유의 짠내가 싸아하니 밀려온다. 모처럼 황성 밖으로 나온 도정은 두 손을 포갠 채, 그 짠내를 맘껏 들 이켰다. 생각보다도 얼마 되지 않았던 황궁 생활이 꽤나 답답했었던 모양인지 가슴속이 탁하니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가 지금 있는 곳은 천진(天津)이었다. 상선감(尙膳監)의 태감인 도욱이 진귀한 식재를 구한다는 명목 하에 이곳 내관감(內官監)의 출장소로 도정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외국과의 대외무역을 통괄하는 시박사(市舶司)가 있는 곳은 광주와 천 주, 영파항이었지만 도욱이 주로 탐을 내는 재료가 몰려드는 데는 섬라 (暹羅), 안남(安南), 방갈랄(榜葛剌), 소납박아(沼納樸兒), 진랍(眞臘) 등지에서 온 배들과 교역하는 광주였다. 하지만 순천부(順天府)에서 광주까지는 너무나 멀었기에 다시 광주에 서 천진을 통해 번향(蕃香)과 번화(蕃貨)가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도공공, 식재에 대한 탐은 여전하시구료.」 「누가 아니랍니까. 양자도 들이셨으니 이제 좀 궁에서 느긋이 계시지, 이런 곳까지 오시다니… 허허, 참!」 「그게 도시 물건을 제 눈으로 봐야 성이 차다 보니…….」 황궁을 나선 일행은 도욱들만이 아니었다. 번저(藩邸)의 증축을 위해 왔노라는 내관감 소감(少監)에 역시 중대한 사건이 있어 친히 나섰다는 대리시(大里寺) 좌시정(左寺正)까지 합세한 터였다. 관료들의 고리타분한 얘기들을 흘러들으며, 출장소에서 마련한 숙소에 여장을 푼 도정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바다냄새에 취한 것도 잠시, 오는 동안 내내 중늙은이들의 한담에 시달 려야 했으니… 고역도 이만저만이 아닌 셈이었다. 궁을 나설 때, 꼭 따라가야 하냐며 자신을 붙잡던 주가휘의 모습이 생 각나는 도정이었다. 하지만, 잠시 이렇게 밖으로 나온 건 그에게도 다른 생각이 있어서였 다. 『오늘도 졌어… 온옥(溫玉)까지 걸었는데.』 그 때의 낙심천만한 황자의 얼굴이 못내 잊혀지질 않았던 것이다. 이영(二影)을 통해 구해오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저번 해독제의 일도 있 고 해서 더 이상 이런 일로 번거롭게 말을 띄우기가 싫었다. 심중은 있지만, 아직 음식에 독을 푸는 작자를 잡아들이지도 못 했으 니… 황궁보고에 대한 나름의 보답이라고나 할까. 아니, 무엇보다도 환하게 웃으며 기뻐할 황자의 모습이 기대되어서일지 도 몰랐다. 아마도 무척이나……. (23) 거뭇거뭇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유시(酉時)―. 도정은 서동(書童)의 차림으로 사람들이 붐비는 상가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역용을 풀까도 했으나, 옷을 갈아입기도 귀찮은 참이라 이렇게 어린 모 습으로 다니게 된 거였다. 도욱의 허락을 받은 두 시진 동안 적당히 물건을 구해볼 요량인 그는 일단 실한 비황(飛蝗)을 팔만한 곳을 물색해보고 있었다. 무영각의 정보 망을 이용하면 쉬운 일이었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썩 내뱉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으니까. ―비단입니다! 거기 어여쁜 소저, 비단 보고 가세요! ―미리미리 약초 준비들 하셔! 다쳐서 후회해도 늦어! ―목이나 축이고 가세요! 없는 술 빼고 다 있습니다! 장사치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내지르며 외지에서 온 뜨내기손님들을 불 러모으고 있었다. 하나 둘씩 환하게 불을 밝힌 거리는 저절로 어깨가 들 썩거려질 듯한 활기가 넘친다. 체구가 작은 그는 바삐 오고가는 사람들 사이에 이리저리 치일 것 같 았지만, 사뿐사뿐 옷깃 하나 스치고 않고 나아가고 있었다. 눈썰미가 좋은 이라면 조금은 의아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다들 자 신의 용무로 바쁜 터라 딱히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약간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약재상 골목을 지나, 두꺼비나 뱀, 시끄럽 게 홰를 치는 닭이나 오리를 파는 고만고만한 가게나 좌판이 벌려진 곳 을 기웃거리며 다니던 그는… 사람을 잡고 물어본 뒤에야 귀뚜라미나 풀 무치를 파는 장사치들이 모인 다른 골목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밤이 깊지도 않았건만, 저편 끝까지 이어진 이 홍등(紅燈)의 행 렬이었다. 그렇다. 지금 그가 서있는 곳은 노류장화들이 사시사철 봄을 판다는 홍 등가(紅燈街)였던 것이다. 거기다, 청루(靑樓)의 불빛까지 시야를 자극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들어선 방향을 잘못 잡은 탓인지, 이 홍등가를 빠져나가야지만이 그가 목적하던 장소로 향할 수 있었다. 다 큰 남정네의 몸으로도 왠지 지나가기 낯뜨거운 장소를 도정은 모른 척 고개를 숙이고는 재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머나, 어린 공자… 이 누님이 잘해줄 테니 어여 들여와 봐! ―노화(老花), 네 년은 만질 젖도 없는 주제에, 어딜 어린것에 눈독을 들여? 공자님, 난 아직도 가슴이 탱탱해요, 만져 봐요! ―저것들을 상대하면 몹쓸 병이나 얻는단다, 자아, 이리 오려무나. 싸구려 분냄새와 함께 깔깔거리는 여인들의 웃음소리를 계속 무시하며 점차 걸음을 빨리한 그였다. 푸욱―. 하지만, 너무 서둘렀던 탓일까. 도정은 자신이 마주 오던 누군가의 가슴팍으로 뛰어든 것을 깨달았다. 멀리서도 사람의 기척을 느끼면 부지불식중에 숙련된 신법으로 상대를 피해가던 그로서는 실로 뜻밖의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는데……. 어이쿠! 부딪친 사람은 그런 짧은 경악성을 내지른 뒤, 반사적으로 일단 사과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드는 도정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여긴, 어린 서동이 나다닐 데가 아닌데,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느냐? 헉! 순간, 도정은 터져 나오는 헛기침을 다급하게 삼켜야 했다. ―…처… 처… 청안호리(靑眼狐狸)이이―――?! 다시 속에서 내질러진 비명은 도정이 지금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랬는 지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천하가 흔들린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듯한 태산준령같이 우뚝 솟은 코, 호기로움을 담고 쭉쭉 뻗은 짙은 눈썹이 실로 검미봉목(劍眉鳳目)이 란 말이 무색치 않을 백의(白衣)의 미장부(美丈夫). 하지만, 도정은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실은 푸른 눈임을 익히 알고 있 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그 별호만 들어도 절로 욕이 나오는 살막(殺幕)의 소막주 청안호리(靑眼狐狸) 호지연(胡支延)이었으니까! 평상시에 사람들의 이목에 띄기 귀찮아 해, 눈동자 색을 변색해서 다닌 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호지연은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외모를 가지고 있기에, 별반 도움이 안 되는 짓을 왜 굳이 하고 다니는지는 알 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던가. ―존장(尊丈)께서 네가 이런 곳을 드나드는 걸 허락하고 계시는 게냐? 도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놈의 빌어먹을 아버지란 작자가 한 술 더 뜨는 바람에 언제나 도정 들이 잡으러 다닐 때가 훨씬 많았다는 걸 상기해낸 거였다. 뿌득―. 눈치 채이지 않도록 이빨을 뿌드득 간 그는 이내 일개 서동의 모습으 로 돌아갔다. ―길을 잘못 든 겁니다, 나으리.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놈의 행적이 발견된 게 산동(山東)의 태안(泰 安)이라고 했으니… 이 천진 땅에 있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거 리였다. 도정은 자신의 정체를 호지연에게 들키는 날에는, 무림오비(武林五秘) 간에 두고두고 회자될 망신살이 뻗지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경련이 이는 안면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있었다. 자신은 딴 생각을 하다 그랬다 치더라도, 호지연이 부딪치는 걸 피하지 못했다는 건 왠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왜 아직도 자신을 부딪친 그 상태 그대로 답싹 안고 있는가 말 이다?! ―그렇다면, 무사히 여길 지나가게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이것 봐! 도와주지 않아도 돼! 네놈은 저리 꺼져주는 게 일생에 도움이 된단 말이다!)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받쳐 오르고 있었지만, 이 모습대로라면 다른 대 안이 없었다. 몸을 돌려세운 뒤, 어깨에 척하니 손을 얹고는 걸음을 재촉하는 호지연 의 결코 달갑지 않은 행동에 도정은 그 손길을 쳐냈다. (26) ―괜찮습니다. 저 혼자 다녀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아니, 내가 신경이 쓰이는 구나. 비무대회(比武大會) 때 그를 향해 쏟아지던 미녀들의 눈길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서늘하게 돌아서던 인간이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웬 친절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옴팡지게 잘못 걸린 게 틀림없었다. (무림오비의 미녀들을 마다하고, 홍등가나 기웃거리고 다니다니…….) 자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호지연을 이런 곳에서 마주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다. 홍등가에 젊은 남자가 찾아드는 이유야 뻔하지 않겠는 가. 여기서 더 매몰차게 거절한다면 필시 괴이쩍게 여기리라. 할 수 없이 도정은 어깨에 계속 호지연의 손을 얹은 채로 앞으로 나아 가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바짝 끌어당겨지기까지 해 이제는 거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행색으로 나아가야 했기에 도정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바라보던 여인들의 눈에는 점점 살기가 어리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어디서 굴러먹던 말뼈다귀인지 모를 젖내나는 애송이가 하늘에서 내려 온 듯한 천군(天君)같은 장부에게 교태를 부리며 사뿐사뿐 걸어가는 꼬 락서니라니?! ―아니, 저 요망한 것이 어디 남의 구역을 넘봐! ―나으리, 그런 풋내 나는 걸 주워 먹다가는 체하십니다. 무릇익을수록 좋은 것이 여인네의 속살입니다. ―같은 사내를 안아봤자 돌밭에 씨뿌리기지요. 천진의 우물(尤物)이라 불리는 가화(佳花)를 찾아주사이다. 졸지에, 구역을 넘어와 이곳에서 색(色)을 파는 소년이 되어버린 도정 은 화를 낼 기력을 아예 잃어버리고 말았다. 좀 전에 자신을 유혹하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가고,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단 말인가?! 뿌득 뿌드득―. 이대로 가다가는 이빨이 다 갈려 없어질지도 모를 판국이었다. 촤악. 하지만, 호지연은 아예 섭선(摺扇)까지 펼쳐들더니 살랑살랑 부치며 풍 류공자 같은 행세까지 하는 게 아닌가. 그러자, 여기저기서 여인들이 죽는다고 난리들이었다. 구역을 운운하던 누군가의 말대로 어느 정도 나아가자, 이제는 한껏 멋 을 부린 차림새를 한 소년들이 문가에 기대어 몽롱한 눈길로 호지연을 바라보다 이내 표독하게 자신을 노려보기까지! ―체엣, 봉을 잡았군, 저 녀석! ―흥, 어딜 봐도 우리가 낫잖아! …이제는 이 끝없는 골목을 어서 빠져나가기만을 비는 수밖에―. 오슬오슬. 호지연이 닿은 부위마다 소름이 돋고, 속이 거북해지는 게… 아무래도 오늘은 도저히 아무 것도 마시거나 먹을 수 없을 듯 싶었다. 고승의 수행이 이러했을까. 드디어, 홍등가의 끝에 다다랐을 때는 기력이 죄다 빠져 정신이 다 아 득해질 지경인 도정이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덕분에 길을 제대로 찾아갈 듯 싶습니다. 푸들푸들 떨리는 안면을 겨우 진정시키며, 그는 씹어뱉듯 사례의 인사 를 건넸다. 이만 꺼져달라는 무언의 거부와 함께―. ―아니, 아니다… 이 근방에는 시정잡배들이 많으니 너 같은 서동이 혼자 다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구나. 어차피, 한배를 탄 것… 끝까지 책임져 주마. 환하게 웃음 짓는 그 얼굴이 그렇게 가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설마, 나임을 눈치챈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런 낌새는 또 아닌 것 같았다. 도시 무슨 억하심정으로 저러는 건지 도정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처음부터, 정체를 밝혔다면 모를까. 이렇게 된 마당에는 끝까지 갈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도정은 여전히 사람 속을 죄다 뒤집어놓는 그 웃음 앞에서 어쩔 수 없 이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결국, 비황을 찾는 일에서부터… 멋대로 셈까지 하고 호쾌하게 사라진 호지연의 일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추방하기로 한 그이기도 했다. ―꿈에 볼까 두려우이… 정말로 두려워……. 깨어있는 채로 꾸는 악몽은 사뭇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어쨌거나, 호지연이 어디서 이상한 걸 주워 먹지 않은 다음에야 결론은 한가지밖에 없는 듯 했다. ―…청안호리(靑眼狐狸)… 네놈도 완동(頑童)의 취미가 있었던 거냐?! 그렇다면, 비무대회에서 열광하던 미녀들을 돌 보듯 한 그가 이해가 된 다. 그러나, 역시 이해하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던 사실이었다! ―설마… 호리(狐狸)답지 않게 저렇게 친절했던 걸로 봐서… 지금 이 모습이 놈의 취향이라던가……?! 도정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비황들이 바스락대는 목갑을 든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확인하기가 너무도 두려운 사실이었기에―. ―하… 하하, 잘못 안 거야! 암, 잘못 안 게지!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안 하던 짓거리들을 했을 게야! 결국, 그런 변명으로 열심히 자신을 달랜 도정이었는데……. (27) 쏴아아. 바위와 바위틈을 타고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인공폭포의 물줄기가 시 원스럽기 그지없었다. 맑은 계류를 타고 옥배(玉杯)가 빙글빙글 원을 돌며 아래로 두둥실 떠 내려가다 현무의 조각상이 자리를 잡은 돌계단 앞에서 멈춰 선다. 그 모든 풍광을 내려다보듯이 자리잡은 수암정(水岩亭) 이중처마의 금 빛기와에는 산수(山水), 화훼(花卉), 용봉(龍鳳), 기린(麒麟), 해마(海 馬), 용사(龍蛇) 등이 상감되어 멋들어짐을 더하고 있었다. 도정은 황궁에 돌아오자마자 곧 의복을 정제하고는 주가휘의 부름이 있은 이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대내(大內)의 모든 구조물들이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절로 풍류가 느껴지는 이런 정경은 시심(詩心)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다. 정자 앞에 도달한 도정은 채 예를 갖추기도 전에, 자신의 손을 덥썩 잡 고 흔들어대는 주가휘를 대면할 수 있었다. ―도정, 돌아왔구나! 배시시 패이는 보조개가 그 누군가의 속을 긁던 웃음에 비해 너무나도 산뜻한지라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자, 자… 이리 와서 거기 있었던 얘기나 해 줘!」 「전하, 제발 체통을…….」 「후우, 숙고… 알았어, 알았다니까!」 예의 뱁새눈의 환관 숙고(宿顧)가 앞으로 쓱 나서며 그리 말하자, 주가 휘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곱지 않은 동창 환관의 눈길을 받으며 도정은 조심스럽게 정자 위로 올라섰다. 「도정, 요즘은 몸이 날아갈 듯이 가뿐해서 기분이 좋아!」 도정은 그 말에 빙긋이 웃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이 음식의 독을 제거하고 있으니까. 물론, 잠시 떠나 있을 사이에 는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 정도로도 황자는 몸이 많이 좋아진 게 틀림 없었다. 계속 얘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주가휘의 앞에 도정은 준비해온 목갑을 내밀었다. 「어, 이게 뭐지?」 「열어 보십시오, 전하.」 고개를 갸웃하던 주가휘는 도정의 재촉에 눈을 반짝 빛내며 목갑의 뚜 껑을 열었다. 「이… 이건, 비황(飛蝗)이잖아?!」 이걸 구하러 갔을 때의 고생도 황자의 환한 웃음에 저절로 보상받는 기분이 드는 도정이었다. 「일부러 구해다 준거구나! 고마워, 도정.」 그는 신분이 낮은 어린 환관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이 황자가 적 잖이 마음에 들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번에는 오왕부(吳王府)와 겨루어도 지지 않을 겁니다.」 「응!」 확실히 숙고의 지적대로 언행이 황자답지 않은 구석이 많았지만, 이런 점이 꽤나 소탈해 보여 좋았다. 한참동안 목갑을 소중하게 만지작거리던 주가휘는 이번엔 도정이 기뻐 할 만한 일을 알려 주었다. 「도정… 아바마마의 윤허를 받아냈으니, 황궁보고를 구경시켜 줄게!」 「…전하!」 되었다! 이제는 된 것이었다! 도정은 이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황자와 보내는 시간도 나쁘진 않았지만, 역시 이런 모습으로 지낸다는 건 어느 면에서는 고역이었으니까 말이다. ―드디어… 무영검법(無影劍法)의 후삼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군. 쏴아아.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를 흘려 들으며, 도정은 나직하게 중얼거 렸다. 이제는 때가 왔노라고―. (28) 다섯 걸음마다 금의위(錦衣衛)의 위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선 그 삼 층누각은 무성한 푸른 소나무와 측백나무들 사이에 둘러싸여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경비가 삼엄할 수밖에 없는 연유는 바로 이곳이 기진이보(奇珍異寶)로 가득 찬 황궁보고(皇宮寶庫)이기 때문이었다. 방산현(房山縣) 대석와(大石窩)에서만 채굴된다는 거석 한백옥(漢白玉) 에 화반석으로 토대를 짓고, 또한 호광(湖廣), 운귀(雲貴), 사천(四川) 등지에서 벌목된 향내나는 남목(楠木)에 금사(金絲)를 입혀 기둥으로 삼 았으니… 그 외관의 화려함마저도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겹처마를 뒤덮은 유리와(琉璃瓦)에는 바퀴, 그물, 우산, 수레 위에 친 큰 양산, 꽃, 항아리, 물고기, 접시 등의 길상(吉祥)문양이 상감되어 섬 세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도정은 감회 어린 표정으로 그것들을 훑어보았다. 주가휘를 대동해서인지, 예의 상고절진(上古絶陣)은 아예 처음부터 없 었다는 듯이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전처럼 혼자 찾아왔더라면 거기에 부딪쳐 또 뒤로 물러날 수밖 에 없었으리라. 화재를 피하기 위해 진보(珍寶)는 거의 지하석고에 있다는 설명을 전 해들은 그들은 여러 명의 위사들을 대동한 채 황궁보고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다다른 지하보고(地下寶庫)의 육중한 석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은은한 보기(寶氣)가 사방으로 새어나온다. 총 삼십 여 개의 석실로 이뤄진 지하보고는 미로를 방불케 하는 복도 조차도 약 이 장이 넘었고 각 석실의 진열대마다 온갖 재보(財寶)들이 은은하게 불을 밝힌 장명등(長明燈) 아래에서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잠시 피로를 풀 수 있게 석실 앞에 놓아둔 의자마저도 귀한 천축(天竺) 의 자단향목(紫檀香木)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정말, 굉장하지?!」 「…예, 전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런 광경은 평생을 가도 구경해보지 못할 게 분명한 터였다. 도정은 자신의 손을 이끌고 이 석실 저 석실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황 자의 천진함에 입가에 고소(苦笑)를 지었다. 청화용문(靑花龍紋) 항아리에 마치 돌멩이처럼 가득 담긴 보석들을 집 었다가 놓기도 하고, 남양(南洋)에서만 나는 묘안석(猫眼石)과 취옥(翠 玉)으로 장식된 보대(寶帶)를 허리에 둘러보기도 하며 함박 웃음 웃는 주가휘였다. 각 가지 명주(明珠)와 장인의 혼이 담긴 도자기, 최고급 장신구, 무기류 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을 듯한 영약들. 하지만… 도정은 그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어디 있는 거냐?! 도정의 눈가에 초조함이 어리려는 찰나, 마지막 석실에서 비로소 각 문 파에서 실전된 무공비급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고(書庫)여서인지 피수주(避水珠)와 야명주(夜明珠)가 천장에 촘촘히 박혀 석실 내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응? 도정… 무공에 관심이 있었어?」 「예, 입궁하기 전에는 명문대파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지요.」 비급에 관심을 가져도 의심을 사지 않을 만큼의 변명을 늘어놓으며, 도 정은 재빨리 천안통(天眼通)을 시전했다. 아주 짧은 수유의 시간 동안에도 서가에 꽂힌 비급들의 제명이 속속들 이 시야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도정이었다. (어디지… 어디 있는 거냐… 어디……?!) 어느 순간, 그의 눈가에 기광(奇光)이 어렸고… 마침내 목적하는 물건 을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두근두근―. 틀림없었다! 서가의 귀퉁이에 꽂힌 저 비급이야말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무영검법 (無影劍法)의 후삼식(後三式)이었던 것이다! 도정은 흥분을 가라앉힌 뒤, 조심스럽게 비급으로 손을 가져갔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아, 도정! 함부로 책을 뽑거나 해선 안돼! 기관이 작동하니까! 흠칫―. 잠시 다른 석실로 사라졌던 주가휘가 다시 입구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 며 그렇게 소리치자, 도정은 번개처럼 다시 손을 거둬들였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역시 그러했군. 황궁고수가 지키지 않는 대신 기관(機關)이 설치되어 있었어.) 비급을 뽑아 들었다면, 틀림없이 지하보고 전체에 걸친 기관이 작동하 기 시작했으리라. 이 정도의 보물을 지키기 위한 기관이라면 안 겪어봐도 뻔하지 않은가. 설령 그 속에서 살아 나온다 하더라도, 기관을 잘못 건드린 죄로 투옥 되거나 더 험한 꼴을 당하기가 십상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하지 않은 채 빈 몸으로 올 턱이 없는 도정이기 도 했다. 그는 주가휘가 눈치채지 않도록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강도로는 쇠를 능가하고 옷을 지어 입는다면 수화도검(水火刀 劍)이 침범치 못한다는 전설의 천잠사(天蠶絲)였다! 범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천잠사를 천장의 야명주에 걸쳐놓 은 뒤 나머지 한쪽 끝은 여전히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놓았다. ―맘에 드는 게 있으면 하나 가지라고 하고 싶지만, 아무리 나라도 여기 물건은 함부로 가져갈 수가 없으니까. ―아닙니다, 전하… 이런 구경만으로도 황송할 지경인 걸요. 싱긋―. 아쉬운 얼굴을 하는 주가휘를 향해 도정은 그리 미소지은 뒤, 위로 향 하는 돌계단을 밟았다. 꼬리처럼 무언가를 길게 남기면서……. (29) 뿌연 달무리가 번진 어두운 야공(夜空). 도정은 황궁보고가 내려다보이는 한 전각 위에서 팔을 포갠 채로 서 있었다. 계절답지 않게 약간은 쌀쌀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휘저어놓고 지 나간다. 「…가실 겁니까?」 「음.」 한동안 뼈빠지게 일하느라 바빴는지 이영(二影)은 이제서야 슬그머니 그 시커먼 모습을 드러낸다. 하긴, 제 맘대로 왔다갔다하는 거지만… 목적하는 바를 성취하기 직전 인 작금에 와서 굳이 따지고 들 생각은 없는 도정이었다.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시길.」 「걱정도 팔자군.」 그 동안 어울리지 않는 이 환관노릇을 한다고 얼마나 힘들었던가. 여기를 떠나서도 환관들을 종종 보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절대로 뭐도 없는 것들이라고 놀리거나 무시하지는 않으리라. 「…그런데…….」 「또, 뭐가 할 말이 남은 거냐?」 도정은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이영(二影)의 태도가 짜증스러워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소각주(少閣主)의 이런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다고 여기니… 왠지 무척이나 아쉽… 커어억! 순간, 이영은 또 다시 잘못 놀린 자신의 혀를 저주해야만 했다! ―쯔쯔, 이렇게 눈치가 없으니… 삼영(三影)이나 사영(四影) 에게도 우습게 보이지! 그러니까, 일영(一影)이 널 상대도 안 하는 게 아니냐? ―커윽… 거기서 왜, 일영(一影)의 얘기가 나오는 겁… 커억! 결국,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가벼운 분근착골(分筋錯骨)로 몸을 풀게된 도정은 지붕의 기와를 붙잡고 푸들푸들 떠는 이영(二影)을 뒤로 한 채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한 마리 야조(夜鳥)처럼―. (30) 피잉. 도정은 손끝에 쥔 천잠사(天蠶絲)의 감촉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츠츠츠―. 황자를 대동하지 않아서인지, 예의 절진(絶陣)이 그 위력을 과시하며 그의 앞길을 막아선다. 무조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간다면 또 모를까, 한 번 안에서 밖으로 나 온 적이 있는 이상에는 생로(生路)를 못 찾을 까닭이 없었다. 휘류류릉―. 끼아아아―. 진(陣)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염라마귀의 호곡성을 닮은 소리가 사방팔 방에서 덮쳐오고, 무시무시한 바람이 일어 그를 집어삼키려고 들었다!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을 귀신들이 대도(大刀)를 들어 상둥 사지를 자르고, 백호가 시뻘건 입을 쩍 벌리며 앞발을 휘두르며… 푸른 번개를 대동한 이무기가 먹구름 위에서 요동을 친다,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 하지만… 도정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아예 눈을 감고 온 신경을 감아쥔 천잠사(天蠶絲)에만 의지해 앞 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귓가에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소리들이 따라붙었지만, 결코 그 발걸음을 저지하지는 못 했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길 계속하던 도정은 어느 순간, 주위가 고요해지 는 걸 느끼며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낮에 꾸는 한바탕 꿈인냥 모든 것이 사라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회색 하늘에 뿌옇게 번진 달무리가 거기 그대로 서서 그를 내려다본다. (후우… 빠져 나온 모양이군.) 실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에 이런저런 생채기 자국이 남아 있 는 걸로 보아 가히 진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황궁보고를 지키고 있던 금의위(錦衣衛)들을 귀 식대법(龜息大法)과 잠영술(潛影術)로 따돌린 그는 바닥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며 천잠사를 이용해 몸을 날렸다. 천장이나 옆벽 또한 조금만 충격을 가해도 기관이 발동할지도 모르기 에! 지하보고의 입구에도 단단히 무장한 위사들이 버티고 있었지만, 그는 한줄기 바람인냥 그들을 통과해 아래로 내려갔다. 우려했던 고수가 있었 다면 시간을 상당히 지체했을 테지만… 이 정도임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 다고나 할까. 그는 아래로 내려가는 돌계단 역시 품에서 꺼낸 하얀 가루를 뿌림으로 써 낮에 이것과 반응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남겨두었던 자신의 발자국 을 찾아내었다. 같은 보폭과 동일한 무게로 발자국을 되짚은 그는 드디어 목적하던 지 하서고(地下書庫)에 다다를 수 있었다! 역시나, 기관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을 하면서 석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비급이 꽂혀있던 서가로 다가갔다. <無影劍法>―. 다 낡아 너덜거리고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천하와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도정은 또 다시 품속에 손을 넣어 비급 을 하나 꺼내 들었다. 급조해서 만든 거긴 하지만, 저기에 꽂혀있는 것과 거의 그 부피나 무 게 면에서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었다. 무영검보를 뽑아 든다면, 기관(機關)이 작동한다… 하지만 같은 비급을 재빨리 바꿔치기 한다면 발동할 틈이 없을지도 몰랐다. 후우. 도정은 크게 숨을 들이쉰 뒤, 번개같은 손놀림으로 그 둘을 바꿔치기 했다! 긴장을 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지만, 염려했던 일은 일어나질 않았 기에 그는 곧 손에 쥔 진짜 비급을 감회가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드디어 이게 내 손에 들어왔구나! 격동으로 인해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제는 이걸 익히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침입자가 있음을 위에서 알아차리기 전에, 어서 이 자리를 떠야 하지 만… 비급의 내용을 일단 확인해볼 필요를 느낀 그는 책자를 펼쳐 들었 다. 그리고……. ―…이… 이건……?! ---------------------------------------------- 그것은 꿈속의 꿈 푸른 바람이 부는 계절에 미망의 안개를 감고 끊임없이 걸어가는 오솔길의 자취 돌아보면 너무도 아련해 어느새 눈가에 맺히는 꿈의 꿈 손에 잡히지 않는 끝의 끝 푸른 바다와 함께 잠들어 버린 어린 날의 자장가. …언제나 돌아오지 않는 <-존재해도 좋습니까?> (31) 순간, 도정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이 정도로 놀라지는 않을 터―. …비급의 속은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백지(白紙)가 아닌가?! 부들부들. 조금 전과는 틀린 의미로 손이 떨려왔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란 말인가?! 설마, 이중으로 되어 있다거나… 불에 그을려야만 글씨가 나타난다거나 하는 장치가 되어있는 건 아닐까… 하고 뒤적거려도 봤지만 불행히도 그 런 특수한 용도는 없는 듯 했다. 망연자실(茫然自失). 그야말로 넋을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전부 수포로 돌아감은 물론, 망신살이 뻗쳐도 단단 히 뻗치는 셈이었다! ―…철면비투(鐵面飛偸) 한대야(罕大爺)――!! 으드득―. 도정은 무용지물이 된 비급을 두 손으로 짓이기며 이를 갈았다. ―네놈이 감히 날 능멸해?!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도둑놈 같으니라고! 놈이 눈앞에 있었다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었으리라! 도정은 분노로 숨까지 턱턱 막힐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여기를 나가야 지나 그 철면피 같은 놈을 잡아들일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렇게 여전히 이를 갈며 한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눈 앞이 흐려옴을 느꼈다. 어찔―. 거기다가, 정신마저도 아득하게 멀어지기 시작하는데……. ―…서… 설마…….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도정은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비급의 잔해가 사방에 깔린 가운데,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홀로 지켜보던 장명등(長明燈) 안의 심지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 들어 가는 속에서……. (32) 누군가가 부르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한 소리로―. 으… 으음. 도정은 한참만에야 겨우 눈을 뜰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시야가 희뿌옇기만 해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를 빠갤 듯한 어지러움도 한몫하고 있었기에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사물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있게 되었다. ―…정… 도정… 괜찮아? ―…전… 하……? 계속 들려오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던 도정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저… 전하―?! ―응, 나야. 그랬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기문왕자(琦文王子) 주가휘(朱加輝)였다! 입안이 바짝 마른 탓에 소리가 갈래갈래 갈라져서 나왔지만 도정은 개 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목마르지? 이것 좀 마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배시시 웃으며 물이 든 잔을 자신의 입가에 대 어주는 황자의 모습에 그는 심한 이질감을 느껴야만 했다. 여기가 혹여 기문당(琦文堂)이었던가? 아니었다! 결코, 그럴 리 없었다! 지금 그가 있는 장소는 정신을 잃기 전과 마찬가지로 지하석실이었으 니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 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서고(書庫) 안에 계속 있었던 건 확실해 보였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그래, 도정? 목마르지 않아? 이 상황을 도시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왜, 아무렇지도 않은 태연한 얼굴로 이 황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을 수 있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 도정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여기에 몰래 침입한 게 확실한 그가 아닌가. 그런데, 무슨 일로 다시 이곳에 들린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당 장, 저놈을 잡아 들여라'라고 바깥의 위사들에게 호통을 쳐야 되지 않는 가 말이다. ―흐음… 아직 정신을 다 차린 게 아닌가? 주가휘는 고개를 갸웃하며, 굳어만 있는 도정을 이리저리 살핀다. 그 행동이 너무도 태연자약해, 역시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제대로 인 식하기가 힘들어진다. (…무엇보다도… 왜, 내가 쓰러졌단 말인가……?) 게다가, 아직도 이렇게 사지를 뻗고 누워있는 상태에서 손가락 하나 까 딱할 힘이 없다는 거였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필시 무언가에 당한 게 분명했다. 도정은 불안감을 느끼며 천천히 내공(內功)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33) 윽―. 하지만, 이내 그는 되려 외마디 비명만을 내질러야만 했다. (이… 이럴 수가?! 내공이 모아지지 않는다!) 순간, 도정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당했다! 그것도 크게 당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억지로 내공을 끌어올리려 하지마, 힘들기만 할 테니. 믿을 수 없는 소리에, 도정은 잘 들어지지도 않는 고개를 번쩍 들어 이 제는 웃음을 지운 황자를 부릅뜬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아니길 바랬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혈선(血線)이 달리는 도정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주가휘는 담담한 어 조로 이리 말했다. ―걱정 마. 그냥 군자산(君子散)일 뿐이니까. 충격! 그것은 충격이었다! 군자산(君子散)… 그것은 산공독(散功毒)의 하나로 엄밀히 말하자면 결 코 독(毒)이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어지간한 독보다 위험하기도 했는데, 그건 열 두 시진 동안 공력을 일으킬 수 없도록 하는 공능 때문에 무림인에게는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신선폐(神仙廢)가 아닌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같은 산공독(散功毒)이어도 신선폐(神仙廢)였다면 내공을 펼치는 순간 독기가 급속도로 번져 무공을 영원히 잃게 되니까. 아니… 지금은 그것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전하께서… 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그 사실에 그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자신이 무림인인 걸 알고 행하였다는 소리밖에 더 되겠는가. ―응… 그거야 내가 무공을 모르니까. 생긋―. 한 때는 너무나 순진하게 보였던 황자의 그 미소가 불길하기 그지없었 다. 도정은 혼란스러운 심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제가… 무림인임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 ―응! 아무런 망설임도 없는 그 대답은 도정의 불길함에 박차를 가한다. 지금까지는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고 여겼던 황자의 심중이 도저히 짚이지 않는 그였는데……. ―…그럼… 왜 지금까지……? ―날아가 버리면 곤란하잖아. 날아가 버리면 곤란하다니…? 황자의 대답마저도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공 뿐만 아니라 머리마저도 못 쓰게 된 건지도. 하지만, 곧 도정은 그 의미를 싫어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할짝―. 주가휘의 서늘한 두 손이 그의 뺨을 감싸쥐는가 싶더니, 곧 따뜻한 입 술이 다가와 입안으로 물기를 전해주었기 때문에! 도정의 두 눈은 경악으로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자신으로 인해 젖은 그의 입술을 재차 핥은 뒤, 황자는 다시 생긋 웃어 보이기까지 한다. ―…무… 무… 무슨……?! ―음… 이런 의미로 날아가 버리면 곤란하다는 거야. …이런 의미… 이런 의미――?!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이 도정을 휘감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이 자신이 알던 그 여리고 순하기만 하던 황자 가 맞긴 하단 말인가?! ―늘… 이렇게 하고 싶었지. 누워있는 도정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주가휘는 귓가에 그렇게 속삭였 다. 이미 어린 소년의 면영은 온데 간데도 없이, 굶주린 듯한 사내의 얼굴 이 거기에 있었다. (34) 부르르―. 이건 악몽이었다. 저 절진(絶陣)의 환영보다도 더 지독한! 도정은 밀려오는 한기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거짓된 저 황자의 모습에 철저하게 농락 당한 셈이었으니까. 크윽―. 군자산(君子散)에 당했다는 걸 알면서도, 재차 내공을 끌어올리다 절망 의 신음을 토한 도정이었다. ―헛수고일 뿐이니까, 무리하지 마.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황자의 다독임이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가라앉히며, 도정은 위기를 벗어날 방안을 필 사적으로 묘색했다.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의아한 구석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 않는가. 자신이 무림인임을 안 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자신이 다시 올 줄 알았으며 이 모든 걸 준비해 놓고 있었단 말인가. 앞뒤 정황으로 추정해 보건대, 그 무용지물의 비급에 군자산을 뿌려놓 았던 게 분명했다. 그렇다는 건, 설마 자신의 정체까지도 짐작하고 있다는……?! ―…설마… 내가 누군지……? 의문은 저도 모르게 곧 입 밖으로 쏟아졌고, 이번에도 주가휘는 주저의 여지도 없이 배시시 웃으며 시원스럽게 대답해준다. ―도정(到貞)이 아닌 서문정(西門貞)이라는 것? 허억! 이 상황에서 더 이상 충격 받을 일은 없을 거라 여겼건만, 아무래도 지 나친 자신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역용(易容)이라는 것과, 실은 스물이 넘었다는 것? 도정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처음부터 모든 걸 간파 당하고 있었던 거였다. 어떻게 그리도 자세하게 알고 있는지…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모습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가 안기에는 지금의 도정이 나을 것 같으니 그냥 참겠어. 몇 년쯤 뒤라면 혹시 또 모르지… 나도 이렇지는 않을 테니까. 여전히 한쪽 보조개가 패일 정도로 순진하게 웃는 그 어린 얼굴과 입 에서 나오는 말이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 도정은 손가락을 들 힘이 있 다면 자신의 볼을 힘껏 꼬집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아무리 어리게 보여도 수컷(雄)은 수컷일 수밖에 없다는 소리인 지도. ―…이제 슬슬 약효가 나타날 때도 되었는데. 주가휘의 말이 이어질수록 도정이 식은땀을 흘리는 빈도도 늘어났다. 그보다, 약효라니… 산공독 외에도 또 다른 무언가를 뿌렸었단 말인가. 헉! 다음 순간, 그는 갑자기 하단전에서 마치 불기둥처럼 솟아오르는 뜨거 움을 느껴야만 했다. ―…헉… 대체, 뭘… 설마…?! ―응, 미혼약(迷魂藥). 눈앞이 노래지는 기분이 이러할까. 군자산에 이어 무형무취의 미혼약이라니… 갈수록 점입가경이 아닌가. 이것에 중독되면 성욕이 무섭도록 일게 되고… 관계를 갖지 못하면, 기 혈(氣血)이 끓어올라 심맥(心脈)이 터져 죽고 만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낭패한 경우는 처음인 도정이었다. 그것도 무공을 모르는 어린 소년에게! 헉… 허억. 하지만, 어쩌랴. 내공을 모으지 못하는 탓에 미혼약의 기운은 남김없이 흡수되어 온몸 을 용광로처럼 데워가고 있었다. 열로 인해 붉게 달아오른 피부가 눈앞의 소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 도정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똑… 또옥. 이마에 맺혔던 땀이 뺨을 타고 내려와 내밀어진 주가휘의 손등에 떨어 져 내린다.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 해. 자신이 미혼약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황자의 음성은 열기를 띠고 있 었다. '스윽'하고 얼굴을 더듬는 그 손길에 도정은 몸서리를 쳤다. ―…치… 치워… 헉……. 황자의 손가락 끝이 닿은 곳이 불꽃처럼 타오른다. 애타게 무언가를 갈망하는 욕구가 스물스물 기어올라와 숨을 쉬기조차 도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황자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가장 민감한 부분을 꽉 움켜잡았을 때에는 마치 작살에라도 꽂힌 듯 전신을 부르르 떤 도정이었다. ―역시… 있구나. 하긴, 진짜 환관이 아니니까. 주가휘는 일부러 그 형태를 강조하듯이 아래위로 손을 움직였다.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도정은 충격을 감당 못해 그의 옷자락을 저도 모르게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황궁에 들어온 뒤로는, 특히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했던 부위였다. 그것을 몸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는 마음장신(馬陰藏身)을 익혔다면 좀 더 완벽했겠지만, 그와는 맞지 않는 무공인데다 시일도 촉박했기에 적당히 이목을 속이는 걸로 넘어갔던 것이었는데……. ―환관을 가장하고 황족을 능멸한 죄는 구족구멸(九族具滅)의 대죄야. 몰랐다고는 하지 않겠지? 아… 허윽―. 황자의 목소리는 귓가를 간지럽히며 머릿속에 몽롱하게 울려 퍼진다. 그 내용이 섬뜩하기 그지없음에도. 어느 새, 반쯤 안아 일으켜져 그에게 전신을 기대듯이 앉게된 도정이었 다. ―…아… 커졌다. 눈가에 이채를 띈 주가휘의 음성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옷자락을 더 끌 어당겨 스스로 손의 움직임을 재촉하는 자신의 짐승 같은 욕구에 희미하 게 남아있던 의식이 반대로 서늘함을 더해간다. 흐윽. 자신의 낸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가냘픈 신음. ―…듣기 좋아… 더 들려 줘. 눈앞의 세상이 전부 붉은 빛으로 변한다고 여긴 순간. 도정은 주가휘의 어깨 위에 이를 세워야 했다. 너무 힘껏 문 탓인지, 입 아래가 다 얼얼 해질 정도였다. 하아… 하아. 눈가로 땀이 젖어 들어가 시야가 더 흐릿해져 보이는 도정이었다. 대신, 다른 감각만은 그만큼 생생하게 살아나 분출구를 향해 미친 듯이 맥박친다. ―…이게… 도정의 것이구나. 할짝. 주가휘는 손에 묻은 그것을 입가에 가져간 뒤 혀로 살짝 핥았다. ―이젠… 환관이라고 우기지도 못 하겠어. 그의 목소리는 이젠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려 오질 않았 다. 도정은 손을 뻗었다. 이 정도의 배출로는 몸이 식기는커녕 더 달아오르기만 할뿐이었기에. 뭔가… 좀 더 뜨겁고… 강한 무언가를! 그 손을 잡아 자신의 목에 매달리게 한 어린 황자는 예의 미소를 머금 으며 다시 속삭인다. ―…내가… 도정이 원하는 걸 줄게……. ―……헉… 빨리… 어떻… 게… 하악……. 단 한가지만을 원하는 듯 모든 걸 망각한 도정이 강한 힘으로 매달려 오자, 주가휘는 자신의 입가를 혀로 축였다. 처음이지만, 결코 어설프게 안지는 않으리라. 그는 자신이 있었다. 호색황자(好色皇子)로 명성이 자자한 주가진의 비장의 비전을 왜 귀담 아 들었겠는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한가롭게 차나 마시고 있었던 게 아 니었다. 대내(大內)의 어리거나 얼굴이 반반한 환관들을 거의 섭렵한 사황자의 그것은 거의 신기(神技)에 다다른 터, 그러니까…… ―…하지만… 역시… 나도 급해……. 이미 약효로 익을대로 익은 몸이었다. 게다가, 자제심을 요구하기엔 자신에게 미숙한 점이 많음을 인정하고야 만 주가휘였는데……. 그는 허겁지겁 도정의 하의를 벗겼다. 조금 전의 손장난으로 그의 하지는 이미 습하게 젖어 있었다. 아… 아흑. 맨살이 드러나자, 전신을 부르르 떠는 도정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주 가휘는 다리 하나를 급히 허리에 걸쳤다. 곧 다가올 무언가를 예감했는지, 열에 들떠있으면서도 불안감으로 흔들 리는 눈동자에 주가휘의 얼굴이 따라서 일렁인다. ―…이게… 가지고 싶었을 거야……. 풀어주거나 핥아주기에는 그도 도정도 몸에 붙은 열이 너무나 거세었 다. 부지불식간에 다리로 허리를 꽉 죄는 그 움직임에 싱긋이 웃어주고는 주가휘는 허리를 숙였다. 좁은 입구에 자신의 것을 가져가며 그는 도정의 입술을 찾았다. 그렇게 깊게 입맞추며 조준을 하려는 순간, 황자는 낙심천만하게도 뜻 밖의 방해를 받아야만 했다. 차가운 목소리 하나가 등뒤에서 울려 퍼졌기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군. (36) 이런! 다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주가휘는 평소 미소를 잊지 않던 얼굴을 흉악할 정도로 찡그리다 천천 히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자신의 허리를 강하게 죄고있는 다리를 의식하면서―. ―연(延) 형님! 생긋―. 하지만, 고개가 완전히 나타난 인영을 향했을 때는 입가에 보조개가 패 이도록 그는 웃음을 지었다. ―…인사보다도 네 얼굴과 반하는 그 숭악한 양물(陽物)이나 우선 추스리는 게 순서가 아니겠느냐, 휘? 움찔―. 눈가에 잔경련이 이는 걸 억지로 죽인 주가휘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다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은 자신의 하반신을 내려다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이거요? 하지만, 이 아이가 놓아주지 않는 걸요. 천진난만한 표정의 어린 황자는 더욱더 감겨드는 도정의 뜨거운 허리 를 한 손으로 받쳐주며, 필사적으로 죄어드는 두 다리를 가리켰다. 헉… 허억. 줄 듯 하다가 원하는 걸 주지 않는 황자에게 약이 올랐는지 도정은 손 톱과 이빨을 세워 그 이마와 뺨을 할퀴기 시작한다. 그러자, 갑자기 나타난 사내의 푸른 눈동자가 더욱 짙게 변하며 분노를 드러냈다. ―미혼약(迷魂藥)에 당했다고는 하지만, 너 답지 않은 추태군. 서문정, 그랬다.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바로 청안호리(靑眼狐狸) 호지연 (胡支延)이었다! 호지연은 마침내 주가휘의 그것으로 손을 뻗기까지 하는 도정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명문혈에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물론, 미소를 거둔 주가휘가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도 무시한 채. 아! 몸을 지배하던 뜨거움과는 다른 열기가 거세가 밀려들어오자 도정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더니… 어느 순간,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숙였던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헉…… 여긴…… 허억……. 약의 기운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진기의 힘을 빌려 잠시 눌러놓은 것뿐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완전히 이성을 잃었던 도정은 조금이나마 침착을 되찾을 수 있 었다. 잠시 멍해있던 그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깨닫고는 순식간에 사색 이 되었다. 황자의 허리를 있는 힘껏 감고 있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두 다리와 조금 씩 기운을 잃어가고 있는 듯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건재한 누군가의 양물이 시야에 파고들자 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나, 이내 옆구리를 파고든 손이 황자에게서 자신의 몸을 세차게 때 어놓자… 그들 외에도 또 다른 자가 있음을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었다. ―헉… 허억… 너… 너는… 호… 호리(狐狸)……?! 게다가, 그가 호지연임을 알자마자 지금이라도 당장 자결을 할 것 같은 표정에 사로잡힌 도정이었다. 뜨거운 체온이 떨어져나가자,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주가휘는 내심 이를 갈며 자신의 옷을 추스렸다. ―…연 형님은 이곳에 어떻게 들어오신 거지요? 이 깊은 밤에 당연히 황제의 윤허를 받아 들어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여기에 들어온 순간부터 바깥의 진(陣)은 제 역 할을 제대로 수행하게 되어있지 않은가. 이번에는 적개심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그 물음에 호지연은 누구나 기분이 나빠질 냉소를 머금으며 오른쪽 손바닥을 펼쳤다. ―…그가 내게 남겨둔 거지. 범인은 안력을 최대로 집중해도 보일까 말까한 그것은 도정이 황궁보 고로 잠입할 때 썼던 천잠사(天蠶絲)였다. 덕분에, 호지연도 당연히 꺼려질 수밖에 없었던 그 고약한 진을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남이 껍질도 안 벗긴 걸 홀랑 집어삼키려 하다니… 언제부터 네가 그리 빈한했더냐? 말인즉슨, 남이 침 발라놓은 걸 껄떡대다니… 그렇게 형편이 궁했냐는 소리였다. 호지연으로서는 사실 분통이 터질만한 일이었다. 잘 좀 부탁한다고 맡겨놨더니, 저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애송이 가 차려진 밥상으로 치부를 해버렸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추궁을 해대는 그의 말에 주가휘는 여전히 생긋생긋 웃기만 했다. 백 마디 말보다 이편이 상대의 심사를 거슬리게 한다는 걸 주지하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들이 잊고있던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 ―…헉… 헉… 어째서… 호리(狐狸)… 네놈이… 그 꼬마와……. 작금에 이르러, 황자에 대한 예(禮) 따위는 이미 아무래도 좋은 도정이 었다. 아무리 머리가 열기로 인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한가지만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저들이 꼭 작당한 패거리처럼 보이는지! 그리고, 엄청난 신분 차를 무시하고 왜 저리도 격의가 없어 보이는지! 그러자, 주가휘에 마치 정인(情人)을 대하듯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담 뿍 담으며 이리 대답해 주는 것이었다. ―연(延) 형님은 황실의 친번(親藩)이야. 경악! 새삼 경악할 기력이 남아 있다는 게 용했지만, 도정은 얼빠진 사람 마 냥 주가휘와 호지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친번(親藩)이라니… 그렇다는 건, 호지연이 황족(皇族)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무림오비(武林五秘) 중 하나인 살막(殺幕)의 소막주인 그가 어떻게 황 족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정녕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한가지밖에 없었다! ―…그런… 허억… 설마… 살막이……?! ―경왕부(炅王府)의 또 다른 모습이지. 경왕(炅王)이라면 당금 황제의 이제(二弟)로 태안에 번저(藩邸)를 둔 주자군을 일컬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호지연(胡支延)이 아닌 주지연(朱支延)이지. ―이황숙(二皇叔)도 기왕 무림에 뜻을 두셨다면, 황족의 신 분을 생각해 좀 더 제대로 된 문파를 세우실 것이지. ―우리 살막(殺幕)이 황실에 폐를 끼친 적은 없다, 휘. ―그렇다고, 황실의 의뢰에 대해 특별히 대우를 해준 적은 없잖습니까? 그 아비에 그 아들놈이라고 진(眞) 형님도 늘 한탄하시더군요. ―그건, 그 놈이 성가신 일만 맡기는 주제에 외뢰금을 터무 니없이 깎으려고 드니까 그런 게다. 내세우는 변명 또한 어찌 그리도 궁핍한지. 도정은 전신을 태울 듯한 이 열기에 죽어 나가기 전에, 복장이 터져 죽 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반신을 거의 드러낸 채로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두 놈의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헉… 허억. 그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엉금엉금 기어갔다. 이 몸으로 여기를 나갈 수 있으리란 장담은 결코 못 하지만, 적어도 그 시늉이라도 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이내 호지연의 손에 답싹 들려져 그의 무릎에 안기게 되자… 자신의 신세가 정말 기구함을 절절이 깨닫게 된 도정이었다. 치욕적인 그 자세에서도, 서늘한 호지연의 장삼이 뜨거운 몸에 기분 좋 게 감긴다고 여기는 자신의 욕구에 치가 떨려온다. ―…산공독(散功毒)에 미혼약(迷魂藥)까지 쓸 필요가 있었느냐, 휘? ―저는 연 형님과 달리 무공을 쓰지 못 하니까요. 조금의 주저도 없이 태연하게 말을 받는 주가휘였다. 그로서는 꽤나 신경을 써서 준비한 이번 일이었으니까. 처음, 호지연이 자신이 아는 자(者)가 황궁보고의 비급 하나를 훔치러 들어올 것이니 지켜봐 달라고 했을 때는 잠시의 소일거리로 생각했었다. 어쨌거나, 황궁보고를 노리는 자라면 하루 이틀에 걸쳐서는 이루기가 힘들 터였고, 장시일 황궁에 머물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서 들어오리라 는 계산에 여러 가지로 검토해 보았었다. 금년에는 과거가 열리지 않았고, 궁녀들 역시도 작년에 들였으니… 남 은 것은 환관의 입궁이었다. 사례감 제독의 일을 거드는 척하며, 여간해서 찾아내기 힘들었지만 인 내심을 가진 끝에 결국 수상한 자를 하나 추려낼 수 있었다. 다음은, 좀 더 감시하기 좋도록 도욱을 시켜 그를 양자로 삼게 했다. 연유를 밝히진 않았지만, 도욱은 새로 들인 양자를 썩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살수수업을 받은 탓인지, 천하의 어떤 미인이라도 목석으로 본다는 저 호지연이 묘하게 집착을 하는 듯한 어린 환관의 모습을 빌린 무림인. 설마, 자신이 말려들게 되리라고는……. 음식에 독이 들었음을 알았을 때의 그의 당황이 손에 잡히듯 해 미소 지었던 주가휘였다. 그가 어떻게 알았으랴. 사실, 독을 탄 것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도정은 동창의 환관인 숙고를 의심하는 듯 했지만, 음식에 손을 댄 건 자신의 명에 따라 사례감의 태감인 도욱이 저지른 일이었다. 태자(太子)의 견제의 눈길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황자들의 암살기 도에 늘상 시달리는 약골의 모습을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한동안은 해독제를 준비한 그의 성의를 생각해 모른 척하고 음 식을 먹어주긴 했지만… 범인을 잡겠노라 결의를 불태우는 그 성의가 못 내 가슴에 와 닿았었다. 살막의 일로 황궁에 들리기 힘든 호지연에게는 단순히 감시하고 있다 라는 언질만 주었었다. 도정이 노리는 게 어떤 비급인지 사촌은 말해주지 않았지만, 서고(書 庫)에서의 그의 태도를 어림잡아 먼저 <무영검법>의 진본을 낚아챈 주가 휘이기도 했다. 지하보고에는 원래 삼갑자의 내공을 가진 황궁고수가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부황(父皇)에게 간청해 그들도 물리게 했고 기관도 멈추게 했 다. 그래야… 도정이 계획한 대로 숨어들기 좋을 테니까. 자칫, 황궁고수가 그를 해하는 사태라도 발생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물론, 꽤 희생은 있었다. 부황의 윤허를 얻기 위해 실로 막내다운 마음에도 없는 재롱으로 며칠 을 소진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가짜 비급에 산공독과 미혼약을 뿌리고 도정을 기다렸던 것이 다. 할 수 없지 않은가. 자신은 아직 어린데다 무공을 쓰지 못하는 반면, 도정은 무림인 중에서 도 고수라고 하였으니. 이런 비겁한 술수 외에는 그를 원대로 안는 건 불가능했다. 어쨌거나, 어떻게 알고 이 자리에 호지연이 나타났는지는 알 도리가 없 지만 결코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공을 들인 만큼 들인 마당에 팔짱만 끼고 구경한 그에게 양보하겠다는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주가휘의 그런 결의를 읽었는지, 호지연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 다. ―훗, 차라리 가진(加眞) 그 놈에게 맡기는 것보다도 못 하게 됐군, ―넷째 형님 같았으면 이미 건드려도 수 십 번은 건드렸을 겁니다. 자신에게 이런저런 완동(頑童)의 비전을 입에 침이 튀도록 전수해주던 사황자(四皇子)를 떠올리며 재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주가휘는 매몰차게 고개를 저었다. 실체로 도정과 친해 보이던 등소운이란 아이도 지금은 사황자가 없으 면 못 사는 몸이 되었다지 않던가. 만일, 진무당(眞武堂)으로 그 소운이 란 아이와 같이 도정도 갔더라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일이 었다. 흐억! 하지만, 그들 사이에 팽배했던 긴장은 곧 도정이 급박한 비명을 내지르 며 호지연의 가슴팍으로 무너지자 이내 당혹감으로 번져갔다. ―더 이상… 진기로도 누를 수가 없게 되었군. 온몸이 시뻘겋다 못해 까맣게 변해 가는 도정의 모습에 호지연은 혀를 찼다. 그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것이었다. 지금 관계를 갖지 못한다면! ―여기서 나가라, 휘! ―제가 저지른 일이니, 책임도 제가 집니다. 자신을 내보내 놓고, 무슨 일을 벌릴지 뻔한 마당에 나가겠다는 바보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자, 호지연은 다시 비릿하게 웃었다. ―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보고만 있을 거라고 누가 그러던가요? 어린놈이! 호지연은 내심 혀를 찼다. 저 정도로 깊게 관여할 줄은 미처 몰랐던 그였다. 아직 행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별 움직임이 없다… 그런 간단한 언질로 만 넘기기에 황궁 밖에 수하를 심어 두었었다. 덕분에, 역시나 사촌동생의 귀뜸이 없어도 도정이 잠시 천진으로 향한 다는 걸 알았고, 예의 홍등가(紅燈街)에서 우연을 가장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경계심을 가질지도 모르니 나설 생각은 없었지만, 주제를 모르는 천한 것들이 그를 유혹하고자 교태를 부리는 모습을 도저히 묵과하기가 힘들 었으니까! 물론, 주가휘를 위해 비황(飛蝗)을 구하러 다닌 걸 알았더라면… 셈까 지는 해주지 않았을 터이지만. 무영각(無影閣)의 소각주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는 그 답지 않게 꽤 상냥하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가증스러운 저 어린놈은 그걸 빌미로 그에게 들러붙은 게 틀림없었다. 『훗, 무림오비의 후기지수(後起之秀) 중 가장 빼어난 준재라니… 너무 과대평가를 했군.』 삼 년 전, 비무대회 때의 그 말에 적염랑(赤焰狼) 서문정은 자신을 죽 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호지연으로서는 자신 나름의 칭찬이었다. 자신과 호각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호의에서 나온―. 왜, 그가 저리도 화를 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나 할까. 『아이구, 마… 그게 칭찬이라고?! 그리 여기는 건 온 중원 천하에 자네 한 사람 밖에 없을 게야! 암, 그렇고 말고!』 당시, 이마를 탁 치며 고개를 살살 내젓던 신투문(神偸門)의 소문주 철 면비투(鐵面飛偸) 한대야(罕大爺)의 탄식에… 그때서야, 보통은 상대를 업신여기는 걸로 알아들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던 호지연이었 다. 그 후로, 무영각 소각주의 노성 어린 얼굴이 잊혀지질 않았고… 종내 오늘에까지 이르렀는데……. 어느 날,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진 그의 소식이 궁금해… 모습을 감추기 직전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한대야를 추궁했다. 경공(輕功)으로는 누구도 따를 자 없다는 한대야다 보니 추적해 잡아 들이는 게 힘들지, 일단 잡아들이고 나면 그 입을 열게 하는 건 일도 아 니었다. 하긴, 살막의 고문은 무영각도 한 수 접어둔다고 하지 않던가. 어쨌거나, 그 도둑놈은 생각보다도 꽤 질기게 버티다… 적염랑이 황궁 에 비급을 구하러 갈 거라고 실토했던 것이다. 두 번 다시 없을 좋은 기회였다! 황궁이라면 무영각도 섣불리 손을 내밀 수가 없다. 하지만, 황족인 자신은 얼마든지 궁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평소 얼굴도 마주치려 하지 않던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던 호 기! 결코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살막의 일들로 잠시 그 동향을 육황자(六皇子)에게 부탁했던 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사황자처럼 손이 빠르거나, 이번 일로 괜히 살막에 빚을 지워둘 계산을 굴릴 황자들을 제외하다 보니… 그나마, 제일 어린 주가휘가 만만했던 게 사실이었다. 적어도, 아직 덜 자란 그 몸으로 흑심을 품을 일만은 없으리라 여겼건 만… 호색한 사황자보다도 더 독한 녀석이 아닌가! 그나마, 때 맞춰 올 수 있었던 건… 황궁 밖에 심어둔 수하가 가끔 드 나들던 무영각의 이영(二影)이 왠지 안절부절 하더라는 소식을 전하였기 때문이었다. 도정이 머무는 처소에도 없었고, 야심한 밤이건만 기문당에도 그 주인 인 주가휘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었다. '혹여' 하는 마음에 발길을 황궁보고로 돌렸던 것이었는데……. 천잠사(天蠶絲)를 발견한 순간부터, 짐작은 확신으로 변했었다. 틀림없이, 이 안에 그가 있을 거라고! 수상한 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보고를 지킨다는 신비의 황궁고수의 모습도 보이질 않지, 기관 역시도 이곳저곳을 건드려도 꿈쩍도 하지 않는 괴사가 어디 가당키나 하단 말인 가. 그리고, 이 지하서고에 다다랐을 때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적염랑이 어린 주가휘의 몸에 다리를 감고 매달린 채 넣어달라고 조르는 모습이라니?! 좀 더 가까이 다가간 뒤에야, 그것이 미혼약(迷魂藥)에 의한 것임을 알 았지만… 정말로 혼비백산했던 터였다! (39) 그리고, 혈관이 툭툭 솟아오르며 한계에 이른 도정이 이제는 그의 하단전에 아랫배를 문지르며 예의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당연히… 거부할 리가 없는 호지연이었다. 희대의 요화(妖花)라 불리던, 환락선자(歡樂仙子)가 이에 비할까. 습하게 젖은 몸으로 부딪쳐 오는 그 모습에 호지연은 피가 아래로 몰 림을 느꼈다. 사실 적염랑일 때의 그를 더 원했지만, 어린 소년의 유혹적인 살냄새도 나쁘진 않았다. ―…헉… 아흑… 어서……! 도정은 상대가 이미 누구이든 개의치 않았다. 양물(陽物)을 가진 사내라는 사실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으니까! 호지연이 그 등줄기를 부드럽게 쓸어주자, 자지러질 듯 흐느끼기까지 한다. ―굳이 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연 형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겁니다. 호지연은 영문을 모를 주가휘의 그 자신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육황자인 그를 해할 리는 없겠지만, 혼혈이나 수혈을 짚으면 그 만인 문제였다. 설령, 호위를 달고 왔다고 치더라도, 금의위 따위가 자신을 대적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한 터. 하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지는 않는 모양인지… 호지연은 자신을 덮쳐드는 막강한 내공이 실린 강기에 대경실색했다! 츠팟― 쿠아앙! 그가 있던 자리는 흡사 벽력탄이라도 터진 듯 했다. 뇌뢰교굉(雷雷交轟)의 수법으로 강기를 날린 암중인은 머리부터 발끝 까지 금의(金衣)로 휘감은 복면인이었다. 숙련된 살수의 감각으로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 그 공세를 넘긴 호지연은 고소를 지어야만 했다. ―…황궁고수를 기다렸던 거군. ―모든 것에 만전을 가하는 게 제 원칙이다 보니. 호리(狐狸)란 별호는 눈앞의 소년에게 주어야 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 다. 주가휘는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자신의 수신호가 없으면, 다시 제자 리를 지키라고 황궁고수들에게 명했던 것이었다. 그럴 경우는 거의 없다고 여기긴 했지만, 만일 호지연이나 다른 누군가 의 방해가 있을 지도 모르는 일. 그리고, 고수인 도정을 상대로 산공독과 미혼약만으로는 완전히 안심이 안 되었으니까. 호지연은 자신의 발치에 쓰러진 도정에게로 손을 뻗었다. 급하게 몸을 띄우다 보니, 그와 틈이 생겨버린 것이기에. 금의인(金衣人)은 삼갑자(三甲子)의 내가고수(內家高手)였다. 초식으로 우세하다 치더라도, 현재 일갑자인 그의 내공으로는 많은 무 리가 뒤따른다. ―흥, 어딜! 주가휘는 도정에게로 손을 뻗는 호지연의 행동에 제재를 가하듯 금의 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츠파팟!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공할 공세가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이런, 제길! 덕분에 점점 도정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던 호지연이었는데……. 주가휘는 그런 호지연의 모습에 만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여전히 헉헉 거리는 도정에게로 다가갔다. 반사적으로 매달려오는 그 어깨를 감싸안으려는 찰나! 쿠아아앙! 도정이 누워있던 곳이 갑자기 아래로 푹 꺼지는 게 아닌가?! ―도… 도정――!! 주가휘와 호지연은 동시에 고함을 내질렀다. 그들에게 있어 실로 예상치도 못 했던 일이 벌어진 거였는데……. ―도정! 도정! 연 형님은 됐으니 어서! 주가휘는 다급하게 금의인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이미 한 발 늦어 아래로 뻥 뚫린 시커먼 공동만이 그들을 기다 리고 있었다. ―대체, 어느 놈이……?! 호지연 역시 이를 뿌드득 갈아 부치며,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황궁보고 아래 이 정도로 깊은 굴을 파다니, 예사 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예사롭지 않은 놈은…… 『헤헤헤, 이 도둑놈을 요 꼴로 만들었으니… 이건 내가 훔쳐간다, 청안호리(靑眼狐狸)!』 이런 한 가닥 전음(傳音)을 남김으로써, 호지연의 이마의 혈관이 시퍼 렇게 튀어나오도록 대노케 만들었던 것이다. ―철면비투(鐵面飛偸) 한대야(罕大爺)―――!! 한대야는 그의 똥자루 사부가 봤다면 '저놈이 미쳤다'고 마시던 술을 뿜어낼 정도로 혼신을 다해 경공(輕功)을 펼치고 또 펼쳤다.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는데……. ―낄낄낄, 꼴 좋다! 호리(狐狸) 놈! 그러기에 이 몸을 누가 건드리랬냐! 사실 사지가 멀쩡한 구석이 없었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자신을 요 모양 요 꼴로 만든 호지연에게 통쾌한 복수를 했는데! 혼혈을 짚어 잠시 정신을 잃게 한 서문정을 어깨에 들쳐 매고 그는 황 궁에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했다. 굴을 판다고 시커먼 흙먼지를 뒤집어 쓰다보니, 가끔씩 드러나는 이가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한대야였다. 얼마간 그렇게 한 줌의 진기로 만리를 간다는 만리비행(萬里飛行)을 시전해 달렸을까. 한대야는 다 쓰러져 가는 관제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들쳐 매고 온 적염랑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에… 잠시 쉬어 갈 겸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한 번 씩 거지들이나 신세를 지고 간 듯한 먼지 날리는 안으로 들어가 대충 거적을 깔고는 관운장(關雲長)의 신상(神像) 앞에 자리를 잡았다. 혼혈을 짚었던 서문정을 거적 위에 눕힌 뒤 지풍을 날려 깨운 그는 곧 조금 잘못된 게 아니라 상당히 잘못 되었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극한까지 이른 약의 기운이 서문정을 검붉을 정도로 달궈 놓았기에. 헉… 허억. 뜨겁다 못해 괴로운 지경에까지 이른 숨이 조심스레 내려다보는 한 대 야의 안면을 자극한다. ―어이쿠! 어쩐지 매고 오는데 펄펄 끓더라니… 얼씨구, 이게 뭐야? 산공독에다 미혼약까지 풀었구만! 청안호리… 그 놈이 미쳐도 제대로 미쳤지! 도정… 아니 서문정이 어린 환관의 모습으로 역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영각(無影閣)의 이영(二影)에게 전해들었기 망정이지, 누가 눈앞의 어 린 소년을 그 살벌함에서도 저 청안호리와 호각을 이룬다는 적염랑(赤焰 狼)으로 알아보겠는가. 하지만, 이내 한대야는 사태의 심각성에 신음을 흘려야만 했다. 이런 상태인 줄 알았다면, 결코 들쳐 매고 올 생각을 하지 못 했으리 라. 아무리 호리(狐狸) 놈에게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였다지만―. ―…헉… 허억… 죽을… 것 같아… 나 좀… 어떻게……. 쫘악. 쫘아악. 열기를 못 이긴 서문정이 깨어나자마자 한 짓은 스스로 자신의 옷을 쫙쫙 찢는 일이었다. ―으헉, 뭔 짓이여! 이봐, 적염랑… 지… 진정하라구! 천하제일의 도둑은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쳐 그야말로 사색이 되 었다. 하지만, 서문정에게는 그의 애원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다만, 눈앞에 실해 보이는 사내의 몸이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 다. ―…아흑… 나 좀… 어떻게… 하악……. 마치, 뱀처럼 어린 소년의 몸이 자신을 친친 감아오자… 한대야는 평소 의 능청맞은 그 답지 않게 비명을 내질렀다. ―끄악, 다… 달라붙지 마! 비… 비비지도 마―!! 그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이 얼굴 두껍기로 유명한 도둑놈이 실은 아직도 동정이었다는 사실을! 한대야는 찢어진 옷가지를 아슬아슬하게 걸친 소년의 몸이 천하의 어 떤 탕녀나 요부보다도 더 무서운 것임을 싫어도 자각해야만 했다. 너무나 놀란 탓에 무공을 쓸 생각도 못한 그는, 자신의 아랫도리로 서 문정의 손이 쑥 들어오자… 앉은자리에서 펄쩍 뛰어 올랐다. 하지만, 서문정은 그의 것을 꽉 쥐고 놓아주질 않았다. 본능적으로 그것만이 살길임을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 자… 자네, 그… 그건 놓고… 이… 일단… 크어억! 따뜻한 어딘가로 자신의 것이 쏙 빨려 들어가자, 한대야는 푸들푸들 전 신을 뒤틀었다. 서문정의 입안으로 들어간 그의 양물은 부쩍부쩍 커져만 가는데……. ―자네, 이러면 안 된다구! 나중 일을 생각해! 순간, 너무나 기분 좋은 황홀경에… 확 일을 저질러 볼까도 했으나, 나 중에 제정신을 차린 서문정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었던 한 대 야는 억지로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하악… 내… 가… 싫어… 흑……. 완고한 거절에 그 와중에도 기분을 상한 듯, 서문정의 눈가에 원망의 빛이 어린다. 크억! 그 젖은 눈빛에 관통 당한 한대야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심장을 움켜 쥐었다. ―커어억! 안돼! 안 돼! 넘어가면 안돼! 이놈은 저 적염랑이라구!! 손이 벌벌 떨리며 눈앞의 소년을 바닥에 휙 눕히고 일을 치르고 싶은 욕망이 불기둥처럼 용솟음친다. 하지만, 이대로 그 충동에 몸을 맡겨 버린다면… 평생을 쫓겨다니게 될 게 분명했다. ―하… 할 수 없지! 이것만은 아까워서 내놓긴 싫었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이판사판이다! 한대야는 애써 눈물이 그렁그렁한 서문정의 얼굴을 외면하고는, 품속에 서 옥갑 하나를 꺼내들었다. ―크흐흑… 아깝도다… 아까워! 옥갑를 열자, 안에서 나온 것은 바로 소림(少林)의 대환단(大丸丹)이었 다! 무림인들에게 무가지보(無價至寶)라 불리는 그것을 고작 이런 일로 써 야만 하다니… 한대야가 속이 쓰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도 단 하나밖에 없던 대환단이 아니던가. ―크흐흑… 기필코 만년설삼(萬年雪蔘)이나 공청석유(空淸石乳)로 대신 받아내리라! 무영각(無影閣) 소각주를 구해 줬는데 설마 짜게 굴지는 않겠지. 다른 영약에 비해, 소림이나 무당의 환단들은 이런 속된 미혼약에 탁월 한 공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관계를 가지면 그만인 미혼약의 기운을 없애자고 무림인들이 평생 가도 구경조차 하기 힘들다는 이런 영약을 쓸 미친 인간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 제정신이 아닌 짓을 한대야는 해야만 했다. 모른 척 한 번 관계를 가지는 쪽이 낫지 않을까… 하고 물론 계속 저 울질도 해가면서. 그렇게 너무 오래 시간을 지체한 탓일까. 컥! 서문정의 혈관이 보기 흉할 정도로 검붉게 툭툭 솟아오르고, 입에서는 피를 왈칵왈칵 토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기서 더 끌다간, 영약을 써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리라! 화들짝 놀란 한대야는 얼른 대환단을 삼키고는 녹아 내리기 전에 서문 정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좀 더 빠르게 흡수되도록 추궁과혈(推宮過穴)을 해주는 걸 잊지 않으 면서. 일각(一刻)이 지났을까. 한대야는 겨우 편한 숨을 내쉬기 시작하는 서문정의 잠든 얼굴에 가슴 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후우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관제묘 밖은 이미 어슴푸레 밝아와, 묘시(卯時)가 다 되었음을 알려주 고 있었다. 아무래도 꼼짝없이 여기에 발이 묶일 모양이었다. 그는 주섬주섬 걸친 옷을 벗어 전라의 서문정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왠지 애처롭게 보인다고 여기자, 저도 모르게 이마를 쓸어주고만 한대야였다. 그리고는, 또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어야만 했지만……. ―…정말로… 무슨 일이 이 모양인지……. 낡고 더러운 천장. 서문정은 눈을 뜨자, 이곳이 관제묘 안임을 알 수 있었다.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온 전신이 다 비명을 내지르는 듯 했다. 윽―. 체면 불구하고 터져 나오는 그 신음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하여, 이리도 힘이 없는 것일까. 무공이 폐지된 사람처럼 내력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설마, 정말로 무공이……?! ―아아, 내력이 안 모아져도 너무 염려 말라구. 부작용으로 백일 정도는 그 모양일 테니… 산 게 어디야.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문정은 흠칫하며 경계의 눈길을 들었다. 그러자, 상체를 다 벗은 한대야가 입으로 후후 불어가면서 뜨거운 국물 을 마시고 있는 게 아닌가. 그의 얼굴을 보자, 서문정의 안면은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모든 게 생각난 것이다! 지하보고(地下寶庫)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으며, 주가휘와 호지연이 사실은 어떤 관계였는지… 그리고, 또 자신에게……?! 그곳에서 어떻게 이런 곳으로 오게 됐는지, 왜 저 도둑놈과 같이 있게 된 건지는 알 수가 없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었다! 자신은 분명 미혼약에 중독 됐었고, 이렇게 살아 있다는 건… 누군가와 관계를 가졌다는 소리밖에 더 되겠는가. 그리고, 주가휘와 호지연의 모습이 안 보이는 이상, 눈앞에 떡 버틴 남 자가 그 주범일 가능성이 아주 높았던 것이다. 게다가, 금방 일을 치른 듯한 만족감이 묻어나는 저 상쾌한 얼굴과 땀 이 번들거리는 벗은 상체가 무엇보다도 서문정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철면비투(鐵面飛偸)…… 한대야(罕大爺)……. 으드득―. 짓눌린 듯이 새어 나오는 그 음성에 한대야는 화들짝 놀랐다. 시퍼런 안광이 넘실거리는 서문정의 기색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뭔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어헉! 아… 아니… 난 아니야! 아니라니까!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구! 두 손을 열심히 내저으며 고개까지 세차게 내젓는 한대야였다. 하지만, 평소에 쌓은 신용이 너무 좋았던 모양인지, '썩을 놈이, 발뺌씩 이나!'라는 그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원독 어린 안광에 잘못한 것도 없 건만 한대야는 목을 움츠리고 슬슬 눈치를 살폈다. ―…한 그릇. 움찔거리는 도둑놈에게서 고개를 돌린 서문정은 척하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한대야는 허둥지둥 하며 솥의 국물을 퍼 이 빠진 나무그릇에 넘치도록 담아주는 것이었다. 후루륵. 움찔움찔―. 서문정이 천천히 국물을 넘기는 동안, 한대야는 관제묘의 구석으로 슬 금슬금 기어가더니, 빼꼼이 그의 신색을 살피는 것이었다. 후룩… 후루룩, 서문정은 따뜻한 기운이 퍼지는 걸 느끼며,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한대야가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위인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 었지만, 적어도 이런 문제에 관해 발뺌을 할만큼 비열하다고 한다면… 또 그건 아니었다. 필시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어찌 되었거나, 지금 자신은 무공을 쓰지 못 하는 상태이고… 이런 몸 으로 한대야까지 적으로 돌려서는 썩 좋을 게 없을 듯 싶었다. 비록, 황궁으로 들어가게 된 원흉이 저 도둑놈이라 하더라도… 그건, 무공을 되찾은 뒤에 천천히… 그리고 자근자근 갚아도 될 문제였다. 서문정이 그릇을 내려놓으며, 구석의 그를 '휙' 하고 돌아보자 한대야는 다시 움찔하며 시선을 돌린다. 역시,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지도……. 까딱까딱―. 그런 그를 향해 강아지를 다루듯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서문정은 이렇 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설명해 봐. 한대야의 조리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설명들을 나름대로 종합해본 결과, 서문정은 어느 정도 일의 윤곽이 손에 잡히는 듯 했다. 저 도둑놈의 말을 그대로 믿자면, 황궁보고에 있던 무영검법은 틀림없 이 진본이었으리라. 그것이 가짜로 둔갑한 데는 저 황자와 호지연의 흉계가 따랐을 터―.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미혼약의 기운을 억누른 게 저 짜디짠 한대야가 눈물을 쏟으며 썼다는 소림대환단이라는 거였다. 어지간히 아까웠던 모양인지 그 대목에 이르자, 한대야는 빈 옥갑을 가 슴에 꼬옥 끌어안고는 눈물을 글썽글썽 쏟았다. 하긴, 소림대환단이라니… 저 도둑놈이 실성하지 않은 바에야 그걸 쓸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인데… 사정이 꽤나 다급하긴 다급했던 모양이었 다. 아니면, 도둑놈 심보답게 이 기회에 무영각에 크나큰 은혜를 입혀 두어 평생 우려먹겠다는 속셈인지도 몰랐다. 그 꼴이 보기 싫어서라도, 그만 한 영약을 필히 구해주어야 하리라. 단지, 너무 늦게 손을 쓴 탓에… 열 두 시진이면 사라졌을 군자산(君子 散)의 기운이 백일을 가게 되었다는 거랄까. 덕분에, 이 상황에서 아무런 힘도 못 쓰는 데다, 역용을 풀지도 못 하 게 되어 버렸다. 이런 무력한 소년의 모습으로 한동안을 버텨야 한다는 건 실로 지옥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입을 잘못 놀린 대가로 한대야는 호지연에게 걸려 어지간히 고초를 당한 모양이었고,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리자… 빚을 갚겠노라고 황궁으로 향했던 그는 자신이 보고(寶庫)에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당황하여 무영각에 도움을 청하러 가던 이영(二影)과 조우 를 하게 된 게 일의 전말인 듯 했다. 자신의 안위가 염려되어도, 이영(二影)은 그 진을 뚫고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을 터였다. 설령, 천잠사(天蠶絲)가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혹여, 천리미향(千里迷香)을 몸에 묻히고 온 건 아니겠지? 갑자기, 거기에 생각이 미친 서문정은 어느 새 앞까지 다가와 침을 튀 기며 얘기를 늘어놓던 한대야의 전신을 훑었다. 아니나다를까, 단련된 그의 후각에 익숙한 향기가 희미하게 묻어 나온 다. ―처… 천리미향? 그 와중에, 놈이 그걸 묻혔다고?! ―가장 기본이다, 이 멍청한 도둑놈아! 천리미향(千里迷香)은 천리를 가도 지워지지 않는 향기였다. 그걸 묻히 고 있는 이상에는 아무리 목표물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추적하기가 용이 하다. ―큰일이군. 지금쯤이면 살막(殺幕)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이 펼쳐졌을 터인데……! 호지연이 호락호락 물러설 리가 없었다. 자신이 무사히 무영각으로 돌아간다면, 그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테 니까. 물론, 최대한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방해를 할 건 자명한 노릇이었고. ―…여기서 무영각은 너무 멀어. 신투문(神偸門)의 도움을 받을 길은 없나? ―그… 그것이 뭐다냐, 하하… 하하하. 말인즉슨, 청안호리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나머지 간이 배 밖으로 나 온 한대야가 그의 똥자루 사부가 목숨처럼 아끼는 황궁비도(皇宮秘圖)를 얻기 위해, 독한 천일취(千日醉)를 잔뜩 퍼먹여 사부를 잠재운 뒤 몰래 훔쳐 가지고 나온 거라나. 그렇다는 건……. ―뭐어… 신투문(神偸門)에서도 쫓기고 있다는 거지. 우리 사부한테 걸리면, 꼬챙이에 끼운 뒤 술안주로 해먹겠지… 하하하! 잘도 웃음이 나오겠다. 어찌 이리도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단 말인가. 그야, 그 황궁비도 덕분에 한대야가 지하서고까지 들어와 자신을 들쳐 업고 나올 수 있었던 거겠지만. 실로, 고립무원(孤立無援)에 고장난명(孤掌難鳴)의 처지라 아니할 수 없었다. 천라지망이 완벽하게 펼쳐지기 전에 황궁을 빠져나간 이영(二影)이 조 력을 데리고 오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듯 했다. 어쨌거나, 일단 이 철부지급(轍 之急)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 인 셈이었다. 또, 그리고……. 서문정은 한대야의 헐렁한 옷가지 하나만을 걸친 자신의 허전한 아랫 도리를 내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입을만한 옷부터 구해봐야겠군. 타닥타닥. 이목을 끌 위험이 있다는 건 알지만, 무공을 잃어버린 서문정에게 밤바 람이 몹시 찰 듯 하여 한대야가 관제묘 안에 모닥불을 밝히고 있었다. 차라리 날이 밝은 동안에 이동하는 게 나을 듯 하여, 오늘밤까지는 여 기서 묵기로 한 두 사람이었다. 살막의 추적에 신투문까지 가세했을 터이고… 아마도 황궁고수들까지 개입했을 지도 모른다. 무사히 빠져나간다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하단 말인가. 솔직히, 지금의 서문정은 한대야에게 짐밖에 되지 않는다. 서문정 자신도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치지 않는 그가 내심 고마웠지만, 이래저래 쌓인 게 많다 보니 쉽사 리 사례의 말은 나와주질 않았다. 무영검법의 후삼식에 너무 욕심을 낸 게 화근이었다. 꾸준히 무공을 갈고 닦다 보면, 언젠가는 그 경지에 자연스럽게 도달했 을 지도 모르는 일이건만… 비무대회를 염두에 둔 탓에 자신답지 않게 성급하게 행동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으니… 지금은 천라지망을 뚫고 추적을 따돌리는 것에만 신경을 써야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문왕자(琦文王子) 주가휘(朱加煇). 청안호리(靑眼狐狸) 호지연(胡支延). …여기서 빠져나간다면, 기필코 그 두 놈만은 뼈를 갈아 마시고 말리 라! 살막(殺幕)의 정체가 이왕부(二王府)라니… 언제부터, 황실이 무림의 일에 관여를 했단 말인가. 마치, 색주가(色酒街)의 창기처럼 다뤄졌던 치욕이 떠올라 부들부들 전 신이 떨려온다. 호지연이야 원체 그런 놈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저 어린 황 자가 그리 표변할 줄은 몰랐던 서문정이었다. 『일부러 구해다 준거구나! 고마워, 도정.』 그 웃음이 거짓이라니… 잘도 속아넘어간 셈이었다. 이젠, 그럴 일은 없을 것이었다. 두 번 다시,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린아이들에게 다정히 대 하는 일 따윈… 결단코! 크게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 여겼던 그 약점이, 순간의 방심이… 작금의 상황을 초래했으니까. 가슴 한편에 저린 둔통이 머물고 지나간다. 하지만, 이 순간이 지나면 곧 잊혀질 테니까… 개의치 않았다. 한순간의 일장춘몽(一場春夢). 도화꽃 향기와 함께 손가락 사이로 흩어져 버린 그런 꿈일 뿐―. …서문정은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내력을 모을 수 없는 몸은 자신의 것 같지 않아서, 쉬이 피곤에 노출되 었다. 무겁고 힘들고… 지쳐간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소리 죽인 기척만은 왜 인지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따뜻하면서 축축한 무언가가 감은 눈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도. 깊은 잠으로 떨어져 내리면서도 서문정은 고소(苦笑)하지 않을 수 없 었다. ―…한… 대야… 너도… 였나……. 달빛은 부서져 내리고 밤은 더욱 짙어간다. 꽃이 져버린 누군가의 꿈을 밟고서―. 무영검법(無影劍法). 주가휘는 손에 쥔 비급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격자창을 타고 스며든 십오야(十五夜)의 달빛이 손등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대나무 가지와 함께 싸아싸아 흔들거린다. 누군가의 꿈에서 날아온 듯한 호접(蝴蝶)의 등불이 심지를 타닥 불태 우며 그의 얼굴에도 음영을 새겨간다. ―…괜찮아… 이게 내 손에 있는 한은… 도정은 찾아온다. 만전에 만전을 가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그로서는 날이 새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내일이면 부황(父皇)을 움직여 동창고수(東廠高手)는 물론, 필요하다면 어림군(御林軍)까지 동원할 생각이었다. 하필, 이럴 때에 여름 별궁인 서내(西內)로 수렵을 나가셨단 말인가, 부황은! 주지연(朱支延)은 이미 한 발 먼저 앞서나가고 있지 않은가. 살막의 고수들을 풀어 천라지망을 펼칠 게 분명한 터였다. ―…어째서, 난 이다지도 무력한 건가. 그를 다시 찾는 일에도 이렇게 하나하나 절차를 밟아야 하다니! 부황의 어머니에 대한 총애가 자신에게로 이어지자 역시 정실황후의 소생이 아닌 태자(太子)가 견제의 눈길을 보내는 덕에, 일부러 자중하여 무공도 익히지 않았고… 총기를 드러내는 일 또한 삼갔다. 그렇게까지 해도, 단념하질 않자 스스로 음식에 독까지 탔던 주가휘였 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방해로 여겨졌다. ―…성가신 것들! 마음대로 의중을 펼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황권(皇權)이 필요했다. 여태껏, 황위(皇位)에는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였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보좌(寶座)의 편리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힘이 있으면, 누군가의 허락 따윈 필요치 않았다. 주가휘는 황위 그 자체보다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힘을 원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되찾아올 수 있는 그 힘을! ―…필요하다면 무공도 익힐 것이야. 자신에게 무공이 있었다면, 눈앞에서 누가 훔쳐 가는 걸 좌시하지는 않 았을 터―. 주가휘는 목갑 하나를 손위에 올려놓았다. 안에 든 무언가가 바스락대며 나무를 긁어댄다. 이것을 그가 주었을 때는 정말로 기뻤었는데……. ―…나는 천하의 주인(主人)이 될 것이야. 결심. 그것은 하나를 얻기 위한 크나큰 결심이었다. 바람을 부르고 구름을 일으킬……. ―…아직도인가? 싸늘한 그 호통에 낮게 부복한 회의인들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땅에 머리를 쿵쿵 찧는다. ―…주… 죽여주십시오, 소막주! 주지연은 그런 수하들의 모습에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등을 돌렸다. 철면비투(鐵面飛偸)를 바로 잡아들이지 못한 게 실책이었다. 도망가는 것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놈이 아니던가. 게다가, 미혼약에 당한 서문정을 업고 사라졌으니… 지금쯤은 이미 놈 이 털도 뽑지 않고 한입에 꿀꺽 집어 삼켰으리라! 주가휘, 그 어린 애송이도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지 않은가. 꼴 좋다고 하기에는, 속이 너무나도 쓰린 주지연이었다. 미혼약을 함부로 쓴 대가였다. 다른 사내의 품에 스스로 갖다바친 셈이 되었으니―. 하지만, 부글부글 끓은 이 속내는 대체 누가 위로해 준단 말인가. 서문정 주위에 어슬렁댈 때부터 눈에 거슬리던 놈이었다. 신분도 모를 천한 도둑놈 따위가 감히 자신의 것을 훔쳐 가다니! 고귀한 황족을 하나도 아닌 둘이나 능욕한 죄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대역죄와 맞먹는 터― 어쨌거나, 어린 애송이는 자업자득이라고 쳐도… 자신은 이게 무슨 꼴 이란 말인가. 서문정이 무영각에 틀어박힌다면, 앞으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조차 힘 들어 지리라. 거기다, 살막이 경왕부(炅王府)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되면… 남은 무림오비(武林五秘)마저도 경원시할 게 분명했다. 서로가 정파사파(正派邪派)로 나뉘어 죽을 둥 살 둥 싸우면서도, 관 (官)이 무림에 개입하는 것만은 합심하여 대항하는 게 무림인의 속성이 니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번을 놓친다면… 그를 가지는 건 더더욱 요원해지니까. ―…한대야(罕大爺)… 네놈만은 내 친히 뼈를 갈아 마시리라! 모든 걸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사내에 대한 저주를 퍼부으며 주지연은 더욱더 수하들을 질타했다. 주가휘가 황궁의 고수들을 풀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푸른 달빛 아래서 그의 눈빛은 더욱 짙푸르게 보인다. 분노와 애증 어린 밤의 장막을 두른 채―. 달빛이 또 다르게 발을 머문 진무당(眞武堂)의 한 내실(內室). 사황자(四皇子) 주가진은 그지없이 진지한 눈빛을 한 채, 열심히 붓을 놀리고 있었다. 이윽고, 붓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그는 완성된 그림을 들고 턱을 매만 지기 시작한다. ―흐음… 내가 그렸지만 정말로 잘 그렸군.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숙고(宿顧)? 그러자, 전방에 낮게 부복해 있던 동창의 환관 숙고가 어깨를 움찔하더 니… 이내 침착한 목소리로 답을 한다. ―그… 그렇사옵니다, 전하. 사실, 모든 게 완벽하다는 평이 자자한 주가진이 그림만은 세 살 먹은 아이가 낙서로 그린 것보다도 못하다는 건 대내(大內)의 공공연한 비밀 이 아니던가.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서 화를 자초하고픈 궁인(宮人)들은 당연히도 없었다. ―자, 그럼 그걸 줄 터이니… 찾아오게나. 숙고는 주가진이 내어준 그림을 받아들고 내심 식은땀을 쏟았다. 딴에는 인물을 그린 듯 한데, 이목구비조차도 구분하기 힘든 이것을 가 지고 대체 무얼 찾아오라는 건지……. ―누구를 그린 것이옵니까? 숙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술쩍 그리 물어 보았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무엇 하나 흘리지 않고 잘 새겨들어야 하는 것 이다! 그래야지만, 다시 솜씨 좋은 화가에게 소상히 일러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지 않겠는가. ―얼마나 내가 보고 싶었으면… 밤늦게 몰래 내 처소로 찾아온 손님이지. 후후후, 수줍음이 많은 성품인 게야. 말 한마디 하는 게 무에 그리 어렵다고… 내 품은 언제라도 열려 있는 것을… 후후후. 움찔―, 그것은 설마… 살수라든가, 혹은 살수라든가, 아무래도 살수라든가…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여전히 식은땀을 쏟고만 숙고였는데……. 그렇다면, 좀 더 그 생김새를 자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덕분에 숙고는 한참동안을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된 그 살수의 설명에 얼굴이 시퍼렇게 뜨는 수고를 감내해야만 했다. ―아… 알았나이다! 조심조심 뒤로 걸음을 옮기며 숙고는 이제서야 겨우 사황자(四皇子)의 고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읍했다. 동창(東廠)의 세력확장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서창(西廠)의 고수인 그 는 표면상으로는 동창의 환관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육황자(六皇子)를 모시는 그가 사황자(四皇子)에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가진이 바로 그 서창(西廠)의 영반이었기 때문이 었다! 호색황자(好色皇子)로 알려진 그가 실은 얼마나 담대하고 치밀한 인물 인지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는데……. 숙고가 사라진 뒤 일다경(一茶頃)의 시간이 흘렀을까. 주가진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쯔쯔, 또 뭔가 지레짐작을 하고 있겠구만. 숙고는 다 좋은데, 사람됨이 너무 고지식해서 문제란 말이야. 이번 일은 정말로 개인적인 용무에 가깝건만… 물러서는 숙고의 얼굴 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그 뒤로 한 번도 볼 수 없었는데, 역시 황궁을 벗어난 겐가. 자신이 눈을 맞추며 싱긋 웃자, 천장에 매달린 채로 깜짝 놀라던 사내 의 얼굴을 떠올리며 주가진은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딱히 살기(殺氣)가 엿보이지 않아, 그냥 놓아준 것이 지금에 와서 못내 아쉬운 그이기도 했는데……. 한 번쯤은 더 찾아오리라 기대했건만, 낙심천만하게도 그 후로는 그림 자조차 보이지 않던 사내였다. 그리던 어느 순간,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기 시작한다. ―…대내(大內)의 공기가 심상치 않아. 황궁보고(皇宮寶庫) 주변이 특히 어수선한 것이… 여섯째가 관련된 듯 하여 더 따지고 들진 않았건만… 실책이었나, 으으음. 제왕지재(帝王之才)인 여섯째를 견제하는 태자(太子) 형님에 셋째 형님 또한 심중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궐내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실로 힘든 일이었는데……. ―이놈의 서창(西廠)인지 뭔지 다 때려치우고, 경치 좋은 곳으로 훨훨 유람이나 나다녔으면 좋겠군……. 천생 풍류공자인 주가진은 답답한 황궁이 싫었다. 한참동안 서탁을 툭툭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그는 이내 무슨 생각이 떠 올랐는지 만족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흠, 좋아! 좋아! 수는 만들면 생기는 것! 이참에 그 사내를 찾아 무림이나 뒤지고 다녀볼까. 숙고에게 맡기긴 했지만, 크게 기대가 되지는 않았다. 황궁에 없다면 무림인인 사내가 있을 곳은 역시 무림이 아니겠는가! 좀 전 자리를 뜬 환관이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말만을 연신 내뱉으며 황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풍운(風雲)은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도 그 싹을 틔우고 있었는데……. 매화나무 가지를 다듬던 그 손길은 언제나 정갈했다. 소도(小刀)를 움직이는 주름 잡힌 커다란 손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는 서문정이 괘나 기특해 보였는지 손의 임자는 빙긋이 웃음 지었다. ―정(貞)아, 무림에 나가서 피해야 할 일이 뭐가 있는지 아느냐? ―예, 아버님께 들었어요. 또랑또랑하게 답하는 어린 목소리에 전대 무영각(無影閣)의 각주는 손 을 들어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조손(祖孫)의 이런 모습은 비정한 살수들로 가득하다는 이곳에서 무척 이나 색다른 풍경이었다. ―잘 기억해 두어라, 정아, 무림에 나가거든 절대로 관(官)의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무림인이 지켜야 할 제일 가는 불문율이란다. ―예, 그리 하겠어요! ―허허, 그래! 그래! 그 다정한 한때는 꽤나 오래 전으로… 전대 무영각의 각주가 아직 살 아있을 당시의 일이었다. 지금은 기억조차도 희미한……. 무법천지(無法天地)인 무림에도 암묵의 불문율은 존재했다. 『관(官)이 무림(武林)에 간섭해서도 안 되고, 무림(武林)이 관(官)에 관여해서도 안 된다.』 만약,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을 시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 했다. 그것은 풍운만변(風雲萬變)의 파란을 몰고 오는 일이었기에……. <終> -------------------------------------------------------------- ―이게 무슨 끝이야야야야―!!! 이 끝까지 마이너 작가야아아――! 비명소리의 하모니가 아름다운 2월입니다. 슬그머니 돌이나 칼을 들고 계신 분들, 혹은 이를 가시는 분들. 밖에서 저를 체포할 확률은 매우 희박합니다. 후훗, 절대외출금지.(이럴 때만 도움이 되는.) 이 소설도 이제 만 일년이 된 묵은 소설이 되었군요.(--;;) 그들은 과연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갔을까요. 그 동안 읽어주시고 꼬박꼬박 감상주시고 추천해주신 분들. 그리고 메일 주신 분들 정말로 감사합니다^^ <宦官之夜>를 마치고(동인판 후기) 반 장난 삼아 붙인 제목이라, 제목 자체는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미 떠나간 버스인 것을(苦笑). 100p내외로 무협풍의 소설을 마무리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금새 깨달아야만 했지만, 역시나 물은 쏟아진 것. 덧붙여, 배경과 설정은 거의가 구라임을 밝힙니다. 정상적인 미혼약(迷魂藥)이라면 음(陰)한 여체(女體)를 갈구해야 하지만, 본문 에 쓰인 미혼약은 황실비전(!)의 완동(頑童)용입니다. 일단 이런 끝 ― 잘 봐줘서 1부 끝 같은 ― 이라도 끝을 내니 마음이 홀가분합 니다. 해피물이니 모두 잘 먹고 잘 살았다고 여겨주십시오!(배짱승부). 어쨌거나 엔딩! 일단은 엔딩! 끝입니다! 시작 당시에 불타올랐던 목적은 귀엽고 앙증맞고 거기다 예쁘기까지 한데다 한 쪽 보조개가 매력 포인트인 공(攻)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만 대줘! 나 안 아프게 할 자신 있단 말야, 한 번만 대줘!」라며 앙탈 을 부리는 공이라니… 얼마나 귀엽습니까!! 이미, 일반적인 취향과는 만리장성만큼이나 담을 쌓고 지내는 Kais다운 선택 이었습니다만, 결과는 보시다시피 이렇습니다(낙심천만). 우워어, 차라리 한대야 쪽이 더 귀여워!! ―라며 애초의 목적을 가볍게 탈선해버리고 말았다는. 2002.2.11 (동인지) 2003.2.3(넷상) b.g.m - 鄧麗君 <月亮代表我的心> <夜來香> <甛蜜蜜>